옥성득 교수(UCLA)가 19일 오후 서울 당산동 새물결아카데미에서 '초대 한국교회 7대 논쟁'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번 강연은 옥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출간을 기념해 열렸다.
이날 강연에서는 한국 기독교 초기부터 1915년까지 발생한 7가지 주요 신학 논쟁들을 통해, 서구 기독교가 한국에 토착화하는 과정을 살폈다. 그는 "더 중요한 사건들도 있지만, 논쟁이 일어난 부분들을 중심으로 다뤄보고자 한다"며 "논쟁들을 보면서 선교지 초기에 발생하는 핵심 문제들을 알 수 있으므로 논쟁사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초대 한국교회 7대 논쟁은 ①1894-1904년 용어 문제(Term Question) ②1895-1900년 처첩제 문제(Polygamy Question) ③1895-1904년 제사 문제(Ancestor Worship Question) ④1896-1897년 신문 문제(Newspaper Question) ⑤1900-1904년 병원 문제(Hospital Question) ⑥1904-1906년 교파 통합 문제(One Church Question) ⑦1905-1925년 대학 문제(One College Question) 등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한국만의 특이한 논쟁은 신문과 병원 논쟁이라 할 수 있고, 용어와 교파 통합, 대학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며 "특히 대학 문제의 경우 '하나의 대학'을 평양과 서울 중 어디에 세울 것인가를 놓고 10-20년간 치열하게 논쟁한 것으로, 처첩제 문제로 생산된 자료가 1백여 쪽에 불과한 데 비해 대학 문제는 8천여 쪽에 달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당시 논쟁은 주로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졌다고 그는 설명했다. 선교사들은 만나면 친구였지만 정책과 신학의 문제에 있어서는 치열하게 논쟁했고, 지역과 인물과 성향으로 볼 때는 크게 서울 중심의 1900년 이후 덜 보수적으로 완화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평양 중심의 보수적인 마펫(S. A. Moffet) 사이에 발생한 문제였다.
일례로 '용어 문제'는 '최고 유일신'에 해당하는 용어의 번역 문제였다. 옥 교수는 "하나님의 이름인 YHWH(야웨)는 음역하거나 '주(主)'로 부르지만 엘로힘·테오스는 최고 유일신에 해당하는 용어(term)이자 일반명사이므로 번역할 수 있다"며 "이 다양한 '번역가능성(translatability)' 때문에, 기독교는 특정한 언어 문화권에 토착할 수 있고 다른 문화권으로 이주하여 정착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논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서구와 다른 언어권의 여러 선교지에서도 발생한 문제였다. 우리나라에 앞서 가장 유명한 논쟁이었던 중국의 용어 논쟁의 경우 앞서 들어온 가톨릭에서 중국인들이 선호했으며 유교 고전에 나오는 '상제(上帝)'와 그리스 음역에 가까운 '천주(天主)'를 놓고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가 오랜 기간 다퉜고, 결국 보수적인 프란치스코회가 승리했다. 반면 늦게 들어온 개신교는 '상제'를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기존에 있던 신의 이름인 '가미(神)'가 정착됐다.
옥성득 교수는 "기존 신의 이름(상제, 신, 가미, 하느님)을 사용하면 본토인들이 이해하기는 쉬우나 종교혼합주의(syncretism)의 위험이 있고, 새 용어(천주, 상주, 참 신, 하나님)를 만들어 쓰면 낯선 새로운 신이 돼 의사소통에는 불리하지만 기독교의 정체성은 유지된다"며 "중국에서 가톨릭은 후자의 방법으로 '천주'를 채택한 데 반해 개신교는 전통 신명인 '상제'나 '신'을 채택하는 토착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토착화로 선택된) '가미'가 중국의 신과 달리 더 다신론적 개념이어서 선교에 실패하는 한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의 이러한 토착 신명 채택 전통에 따라 '천주' 대신 '하느님·하나님'을 채택하는 것이 주류가 됐다. 언더우드는 '(아래아) 하나님'이 다신교인 무교의 최고신이므로 배격하는 대신, 가톨릭과 성공회, 개신교가 모두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천주'를 선호했다. 그러나 10여 년의 논쟁 끝에 1904년 '(아래아) 하나님'을 수용했고, 개신교 내에서는 더 이상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방 후 아래아가 없어지면서 '하나님'이 됐다.
옥성득 교수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의 초월성과 위대성이라는 토착성, 유일성이라는 개신교의 정체성, 민족운동이라는 역사성이 결합된 한국 기독교 특유의 용어"라며 "이런 새 용어였기에 기독교는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옥 교수는 "전통적 용어를 그대로 쓰면서도 기독교적 의미를 충실히 담아낸 이것이야말로 토착화이자 성육신적 원리 아니겠는가"라며 "이 문제는 마무리됐고 아주 좋은 모델이지만, 전통 신의 이름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따라오는 비기독교적 요소 등 극복해야 할 신학적 과제도 남아 있다"고 평가했다.
가장 강경한 반대파였던 언더우드가 돌아선 것은 게일(J. S. Gale) 선교사가 하늘(天)의 어원에서 하늘(天)과 한(大)과 한(一)을 찾아내고, 헐버트(H. B. Hulbert) 선교사도 단군 신화에서 환인은 성부, 성령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난 단군은 신인으로 성육신한 성자에 유비된다는 삼위일체론적 해석을 제시하면서였다.
옥 교수는 "초대 한국교회 급성장 요인을 놓고 사회학자나 정치학자 등은 반봉건(근대국가)과 반제국(항일운동) 두 가지 의제에 교회가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라 보고, 이 '민족 교회' 주장이 정통적 해석이기도 하다"며 "그러나 신학적·선교학적 주제들인 '7대 논쟁사'를 분석해 보면, 기독교는 '토착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성장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 제 주장"이라고 했다.
'처첩 문제'에 대해선 "성경에서 일부다처제를 금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는 "성경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이지만, 일부다처를 엄격하게 금하진 않았기에 논쟁이 일어났다"며 "더구나 우리나라는 '처'가 아니라 '첩'이었다는 문제가 있었고, 특히 세례를 줄 때 '첩'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했다"고 밝혔다.
옥 교수는 "세례를 받기 위해 첩과 자녀를 내보내도 그들의 생계가 문제가 되는 등 여러 복합적 문제가 있었기에, 세례는 받게 하되 집사·장로는 못 되게 하는 중도적 입장도 생겨났다"며 "결혼과 가정, 성 문제는 이처럼 상당히 복잡하기에, 오늘날에도 참고할 사항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상숭배라며 '제사'를 금지했던 문제는 한국 교인이 '추도회'라는 '한국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해결했다고 한다. 그는 "제사의 순기능도 있었기에 중국에서도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한국은 우상숭배와 이교적 요소를 빼고 허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선교 20주년을 맞아 제사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가운데, 호주장로교 앵겔 선교사가 '이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성숙한 한국 성도들이 판단할 문제'라고 발언했던 기록이 있다"고 했다.
옥 교수는 "사도신경에 '음부하강' 구절도 서구에서는 다른 문제들로 논쟁이 이뤄졌지만, 한국에서는 제사 문제 때문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며 "이렇듯 교인들의 필요를 어떻게 기독교적 표현으로 만들어 주느냐를 놓고 선교사들이 신학적 작업을 했던 것"이라고도 했다.
최근 출간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는 한국교회 안에 편만해 있는 역사적 적당주의에 도전하고 초기 교회사를 읽는 바른 방법을 제시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저자는 "교계에 널리 알려진 초기 한국 개신교의 역사적 사실 가운데 잘못 전해진 오류를 검증하고, 근거 없는 신화와 치우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여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며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고 사관을 계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 논문의 오류나 온라인에 떠도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바로잡는 것도 시급하다"고 밝혔다.
옥성득 교수는 서울대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신대 신대원과 대학원에서 수학했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석사)와 보스턴대 신대원(박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부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근대사와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한반도 대부흥>과 <대한성서공회사(전 2권)>이 있고, 편역서로 <언더우드 자료집>, <한국교회 형성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