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학교의 급격한 감소에 대해 한국교회의 고민과 시름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감소현상의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을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지난 20세기의 영적 부흥을 다시 체험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안을 듣기 전에 오늘의 한국사회가 직면한 현실부터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순서라 본다. 그 후에 교회의 신앙의 정체성 계승에 성공해 왔는지, 더 나아가 지속적인 다음 세대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최선의 방도는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쉽지 않은 길이지만 뼈를 깎는 갱신의 몸부림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바람은 그저 바람에 그치고 말 것이다.
교회는 한국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는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일 것이다. 정부는 지난 10년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증가에 80조, 고령화에 70조, 합 150조라는 천문학적인 투자를 했다. 그럼에도 '저출산'정도가 아니라 '초저출산'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에 의하면 보통 한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15-49세의 가임여성이 평생 2.1명의 자녀를 낳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은 1.24명(2015년)의 '초저출산 국가'로 세계 224개국 중 220위다. 한국 뒤에 홍콩, 대만, 마카오, 싱가포르 4개국만 있을 뿐이다. 한국여성의 초산(初産)의 나이가 이미 33세를 넘어섰고, 35세 이상의 '고령산모'가 늘고 있다. 이런 상태이니 1명 이상의 자녀를 갖기가 쉽겠는가? 여기에 최근에는 자녀 때문에 고생하지 않겠다며 미혼남성들이 정관수술까지 하는 기현상마저 증가하고 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고령화의 문제는 상황이 어떨까? 고령화는 보통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의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고령화 사회(7%)', '고령사회(14%)', '초고령화 사회(20%)'로 구분된다. 한국은 현재 14%가 조금 못되는 '고령사회'다. 10년 후인 2026년에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의 고령화가 걱정되는 것은 일본과 비교할 때 그 속도가 두 배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내년부터 생산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향후 노인복지와 부양에 대한 부담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일 것이다. 대부분 노후에 대한 대비가 전무하고, 국가 역시 이것을 뒷받침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에 미래가 밝지 않다. 이처럼 한국사회는 '초저출산, 초고령사회 진입단계'라는 위기에 놓여 있는데도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이런 상황에 있는데 교회가 예외적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교회도 한국사회의 일원이기에 고통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잠시 한국의 교육시스템에 대해 살펴보자.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그동안 학년 당 60만 명 체제로 운영되어 왔다. 100만 명이 넘을 때는 2부제 수업으로 감당했지만, 출산율이 감소하면서 2015년엔 43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현재 20만 정도가 남아돌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30% 정도의 교사, 시설, 관련 협력체제 등이 감축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최근 정부는 전국초등학교의 22%인 1,395개 학교가 신입생을 받지 못해 내년부터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주일학교와 청소년층의 감소는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계승에 성공하고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한국사회와 교회가 직면한 현실에 대해 살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대안을 살피기 전에 한 가지 더 짚어볼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그동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계승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으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것을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의 정체성 계승을 위한 그들의 열심과 체계에 대해 살펴보자.
세계에서 정체성 계승에 성공하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든다면 유대인과 무슬림이다. 유대인의 경우 지난 3,500년 동안 온갖 설움과 유리방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시대, 지역, 그리고 민족과 관계없이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무슬림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400년 동안 무슬림의 정체성이 계승되고 있다. 다른 민족 같으면 백년만 지나도 그 지역에 동화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을 텐데 저들은 저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저들 특유의 4중 체계에 있다. 먼저 유대인의 경우를 보면, '가정', '예시바(종교학교)', '회당', 그리고 '사회'라는 유기적인 체계에 의해 유대교인을 양성하고 있다. 저들은 토라와 탈무드를 중심으로한 '유대교인'을 만들기 위해 철저한 '유대교육'을 시킨다. 가정에서부터 토라를 암송하고 탈무드의 다양한 사상을 습득함으로써 정체성의 기초를 닦고, 종교학교인 예시바에서는 더욱 심화시키며, 회당에서는 유대교의 종교적 실천을 나타내고, 사회에서는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분명한 유대교인을 키우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진리의 계승, 보존, 파수를 위한 유대인의 노력의 과정에서 형성된 특유의 교육방법이 '하브루타(havruta)'다. 하브루타란 대화, 토론, 논쟁을 통해 유대인의 경전과 지혜를 습득하는 창의적인 학습법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하브루타에 대한 붐이 일고 있는데, 유대인의 영성을 간과한 채 도구로만 다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유는 영성이 결여된 하브루타는 똑똑하고 말 잘하는 아이를 만드는 또 하나의 지성 프로그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최고 목표가 인성의 함양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성경적 영성 함양을 목적으로 하브루타를 적절히 사용한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양육에 도움이 된다. 그 점에서 유대인의 교육이 성화의 측면에서 강점을 가지는 것이다.
무슬림의 정체성 계승은 어떤가? 무슬림들의 양육방식은 유대인의 4중 체계를 그대로 벤치마킹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많은 부분이 유대교와 유사한 것은 창교주인 무함마드의 배경이 유대교와 밀접하기 때문이다. 그의 처인 카디자나 그녀의 외사촌인 와라까 빈 나우팔은 유대교 분파인 에비온파(abionite)의 사제였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초기 메카시대에 유대교인들에게 호감을 갖고 대했으며, 유대인의 협력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가 무너지자 후기 메디나 시대부터 반유대적, 보복적 성격이 강해졌던 것이다. 이런 유대교의 직·간접의 영향에 의해 무슬림들 역시 '가정', '마드라사(종교학교)', '모스크', 그리고 '사회'체계라는 4중 체계에 의해 요지부동의 무슬림을 양성하고 있다.
무슬림들도 경전을 철저히 암송하고 율법을 지키려 무던히도 애쓴다. 유대인과 무슬림의 교육방식은 매우 유사하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다면, 유대인은 창의적, 논리적, 비판적인 열린 학습방법을 취하는 반면, 무슬림들은 무비판적 암기식 교육체계를 통해 논리적 사고를 막는 닫힌 구조의 학습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식이다. 어찌되었건 유대교인이나 무슬림들은 정체성을 계승을 위해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한다. 두려울 정도로 공을 들인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기독교인의 정체성 계승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어떠한가? 한국교회는 '가정', '학교', '교회', 그리고 '사회'체계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가정은 가정대로 붕괴되고 있고, 학교는 공교육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며, 교회 역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회체계 역시 동일하다. 사실 유대인과 무슬림과 비교해서 한국교회는 그 출발의식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생존'과 직결된다. 무슬림 역시 마찬가지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심어놓은 유대인을 향한 복수심과 세계의 이슬람화(다와)라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 양자 모두에게 정체성 계승은 생존과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저들처럼 절박하지 않다. 거듭나지 않은 교회 안의 세속화된 종교인들에게 정체성 계승이 중요하기나 하겠으며, 필요성을 느끼기나 하겠는가? 당연히 허술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다.
교회가 마음에 깊이 새기고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초저출산과 고령사회라는 '현실적인 암초'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계승이 요원한 '영적인 암초'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해결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한 줄기의 빛을 비춰주지 않는다면 어디서 탈출구를 찾을 것인가?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양육하고 공동화 현상(空洞化 現象)을 피하려면 힘써야 할 것이 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공동체
현대교회의 침체의 원인은 교회가 하나님의 필요보다 사람의 필요를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 부담 없는 교회, 온갖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세련된 교회, 치유와 저급한 신비체험 등을 맛보게 하는 기복적 교회를 조성해주려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선호했고 그런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여겼다.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지만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적 침체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교회가 간과하고 있었던 중요한 진리가 무엇인가? '거듭남' 혹은 '중생'의 중요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나 무슬림 같은 어떤 사상에 오랜 세월 세뇌되어 길러진 인위적인 종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거듭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사람이다. 따라서 교회는 한 영혼이 중생하기까지 주의 깊게 살피며 기도하고 돌봐야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모임이 참 교회요 그런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교회는 사람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계승을 위한 체제 구축
한국교회는 유대인이나 무슬림과 비교해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 속에 있는 성령의 기관이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문제되는 각 분야에 소명의식을 가진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팀을 꾸려 구체적, 집중적으로 대안을 찾아 정체성 계승을 위한 유기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붕괴되고 있는 '가정'의 회복. 이혼, 재혼, 별거, 가출, 동거, 유기, 한부모 등에 의한 가정의 해체가 심각 수준을 넘어섰다. 이혼만 해도 OECD국가 중 9위, 아시아 1위다. 가정의 회복 없이는 교회뿐 아니라 이 민족의 미래도 없다. 총회, 신학교, 각 기관이 긴밀히 협조하여 가정의 회복을 위한 다양한 방도를 찾아 도움을 주어야 한다. 가정의 회복은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다.
신뢰를 상실한 '학교'의 회복. 한국의 공교육은 방향도 철학도 부재할 뿐만 아니라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교육관계자들만큼 변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없다. 공교육으로 불가능하다면 교회가 성경적인 인성과 영성으로 무장한 기독교 대안학교를 세워서라도 학교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교회 본연의 정체성 회복. 혹자는 교회가 지금처럼 타락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이 교회 안에서 온전히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예배당에 다녀오면 원리주의자로 변하듯이, 교회 역시 죄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유기적인 사회 체계 구축. 이는 앞서 언급한 가정, 학교, 교회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실적 암초와 영적인 암초를 제거하려면 전 방위적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늦은 감은 있으나 최근 정부가 '보육지원'과 '출산지원'이라는 투트랙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다행이다. 청년들의 좌절과 워킹맘의 아픔을 보듬는 정책과 더불어 교회의 영적 순기능이 함께 한다면 해악한 암초들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3. 강한 그리스도인 정체성 함양
경전 습득을 위한 유대인과 무슬림들의 노력은 가히 두려울 정도다. 보통 유대인 남자는 13세에 성인식을 한다. 그때 토라 즉, 모세오경을 전부 암송해야 한다. 성인식 이후에도 토라와 탈무드 연구는 평생 지속된다. 유대인들에게 경전과 유대교는 삶 그 자체다. 그렇다면 무슬림은 어떤가? 역시 동일하다. 꾸란을 암송하고 마드라사에서 철저한 무슬림으로 만들어진다. 서구 무슬림 사회에서 꾸란 과외는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며 꾸란 암송에 불성실한 자녀를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교회가 저들의 반만 따라가도 오늘의 걱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성경에 관한 조각지식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4. 상생을 위한 처절한 개혁
한국교회는 처절한 개혁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분립개척'이 있다. 인색한 몇 푼 지원으로 생색내지 말고 준비된 목회자와 성도를 중심으로 분립개척이 이루어져야 한다. 청교도들처럼 목회자가 가정 가정마다 살피고 양육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가 아니다. 필자는 적어도 300-500명 이상 되는 교회들은 분립개척에 힘써야 한다고 믿는다. 대형교회 목회자의 경우 자기교회의 교인임에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분립개척은 모든 성도가 성숙해지고 다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축복이다. 둘째는 건물 목회에 목숨 걸지 말라는 것이다. 목회자의 과욕으로 빚을 내서 예배당 짓고 평생 빚 갚다 끝나는 어리석은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 주님 오실 때까지 남기고 세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지, 건물이 아니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환란의 시기가 다가옴에도 후손들에게 건축 빚을 떠넘기는 어리석은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목회자의 빗나간 자녀 사랑에 의한 교회세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의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피해야 한다. 다음세대가 줄어드는 시대에 현재의 안정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한국교회는 뼈를 깎는 개혁을 통해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은혜를 체험해야 할 것이다.
5. 교회의 최대 사명은 전도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무신론자라는 통계이다. 이는 전도해야 할 대상,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전도를 포기할 수 있는가? 다음세대에 대한 대안도 고민해야겠지만 전도하는 교회에 다음세대도 있는 것이다. 복음 전파가 멈추는 순간 교회는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다. 전도와 관계하여 교회 내에서 적극적으로 출산을 도모하는 것도 필요하다. 교회는 도울 수 있는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교회에 젊은 세대들도 모이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다음세대가 줄어드니 무슬림들의 유입을 통해 인구감소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철없는 어리석은 정책은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대안이 아니다.
나가는 말
최근 이슬람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현지 무슬림 부모들이 한국에 와 있는 자녀들의 종교 상태를 매일 체크하고 있으며, 혹시나 기독교로 개종했을까 항시 감시를 한다는 것이다. 간혹 개종을 하게 될 경우 어떻게 알았는지 즉시 그 사실이 본국에 통보되며 귀국하게 되면 곧바로 이슬람교로의 복구 프로그램이 가동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 역시 앞서 살폈듯이 유대교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유대인이나 무슬림들 모두 죽고 사는 각오로 정체성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 정도의 체계도 열정도 없다. 어설픈 열심과 허술한 조직으로 막연히 은혜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한국사회가 직면한 환경은 그리 좋지 않다. 우리는 지금 초저출산, 초고령화사회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것은 향후 교회에 다음 세대가 사라지고, 노인들로 가득한 교회가 되며,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그 노인들마저 사라져서 교회는 텅 빈 공동화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예배당 건축경쟁에 뛰어들어 평생 빚 갚다 끝나는 바보목회를 할 것인가? 작금의 세대는 20세기의 세대와 다르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세대다. 희생과 섬김이 낯선 세대다. 앞으로 과학의 진보로 삶은 편해지겠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피폐해져 가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이단은 득세할 것이고, 특별히 무슬림들로 인한 혼란은 더욱 가중되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신앙고백을 요구받는 순교의 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시대가 우리를 기다리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을 파수해야 한다. 순교까지 원하시면 기꺼이 감당하며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처절한 갱신의 몸부림이 뒤따라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교회가 중생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계승을 위한 체계를 구축하며, 성경으로 철저히 무장한 교회, 전도에 힘쓰는 교회, 더 나아가 참된 교회를 사모하고 만들어가는 성령의 교회가 된다면 다음세대가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연의 모습과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더욱 어두워가는 것을 아닐까?
이제 세상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 시대에 받은 우리의 사명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다음 시대의 배교나 고통은 다음 세대의 믿음의 몫이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몫에 충성하는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할 일이다. 첨언으로 덧붙인다면, 지금까지 필자는 위기를 맞은 다음세대에 대한 대안을 거시적 차원에서 제시해 보았다. 아쉬움으로 남는 미시적 차원의 구체적인 정책이나 지원책은 앞서 언급했듯이, 각 분야의 소명 받은 전문가 팀을 꾸려 서로 머리를 맞대 대안을 마련하고 지원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믿는다.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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