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발라란?
카발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나 외국에서는 유명 대중 가수 마돈나나 한때 미 프로야구 최고의 대스타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이 종교에 빠졌다고 알려져서 유명세를 탄 유대 신비주의이다. 사실 카발라는 그 역사가 오래 되었음에도 국내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이렇다할 관련 논문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카발라의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전무한 형편이다. 아마 이교적 색깔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눈과 귀를 억지로 막아버리는 옹졸한 구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신비주의는 아니나 신비적인 기독교
성경은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으나 신비적이다. 여전히 과학적 분석을 거부하는 천사들의 존재나 에녹의 승천이나 에스겔의 하나님 체험이나 불말과 불마차와 함께 승천한 엘리야의 경험은 경천동지할 신비적 현상이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일시 재림한 변화산 사건이나 예수님의 모든 삶 자체가 대단히 신비적이다. 다만 그 체험이 너무나 엄청난 신비들이라 인간 경험 밖의 체험이라 여기고 언급 자체를 꺼려 왔을 뿐이다. 기독교는 다분히 예수의 기독론적 신비만 역사적 사실로 다루는 데 집중하여 왔다. 그런데 카발라는 놀랍게도 기독교도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이런 성경의 건드리기 어려운 미묘한 곳들을 건드려 기독교도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은 지성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 지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지성은 때로 지성인에게 신앙적 증명의 부담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기독 철학자 내쉬(R. Nash)는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선험적 이해(a priori)나 태도만을 성경 속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는 성경을 잘못 읽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벨링(Ebeling)이 지적했듯이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적(adversarius noster)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재 상태나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단순히 강화시켜 주거나 확증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성서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융합하는 것은 그리 수월한 문제는 아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잡다단한 포스트모던 상황의 21 세기를 맞아 여전히 사도 베드로가 말하듯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신앙적 답을 준비해야 하는 무거운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흥과 성장에만 집중하는 사이에 한국 기독교는 신앙적, 신학적 성숙을 외면하여 왔다. 이런 값싼 기독교의 경향은 지성의 포기로부터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신학과 과학의 문제 그리고 창조론 교리는 그동안 국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방치해 놓은 분야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교회는 기원 문제, 핵문제, 인간 복제 문제, 광우병 문제, 환경 문제 등등 신학과 과학이 함께 소리를 외쳐야 되는 일들에 있어 철저히 대중 앞에 무기력함을 경험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들은 아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시작해야 할 일이다. 창조론 오픈 포럼 운동은 지난 2007년 이 문제에 눈뜬 몇몇 크리스천 과학자, 신학자, 과학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렇게 출발하였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본격적으로 만난 국내 최초의 모임이 되었다. 국내 기독교 역사에 비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의 크신 행사를 즐거워하며 연구하는 지속적 모임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내 기독교도들에게는 생경하나 유대적 배경을 가진 이 신비주의에 대한 작은 창조론적 모색도 이런 창조론 운동의 지평이 풍성해지는 데 작은 주춧돌하나 던지는 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카발라의 기원
카발라 (Kabbala)는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을 말한다. 하지만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벨론(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확산되면서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즉 토라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눈다. 첫째 페샤트(Peshat)는 표면적인 의미를 다루고, 둘째 레메즈(Remez)는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를 다룬다. 셋째 데라쉬(Derash)는 랍비의 해석 또는 미드라쉬(Midrash)적 재해석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토라가 담고 있는 비밀의 신비적인 해석을 소드(Sod)라 하는데 토라에 담긴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이 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카발라 사상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모세에게 전한 구전(口傳)이 최고의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 하나님이 택하신 신실한 교사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비전(秘傳)의 형태로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도덕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오역(誤譯)할 위험을 배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발리스트들은 카발라 사상에는 성경에 다 담지 못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비한 사상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비한 내용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확신은 신비를 도구화하는 누를 범하기도 했다. 13세기 유럽에서 카발리스트들이 우리의 부적이나 수리수리마수리처럼 "아브라카다부라"(ABRACADABRA)라는 주문의 효과를 기만하고 과장하여 마법적 액막이의 도구나 부적처럼 사용한 것은 신비주의가 어떻게 사람을 기만하는 가를 보여준다.
신비주의를 닮아가는 한국 기독교
최근 한국기독교는 빠르게 이 같은 미신적, 신비적 기독교화되어가는 걱정스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가 신비적이라고 신비주의화 되면 큰일난다. 기독교는 바른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에 기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근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는 한국기독교의 신비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믿음, 바른 신학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된 진리와 해석을 찾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길을 다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은 미숙한 자들이 신앙과 신학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독교에는 아주 생경한 이 유대 신비주의에 대해 신앙의 눈으로 좀 더 살펴보자(계속).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