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웃음'이란 마음의 긴장이 갑자기 무너지고 즐거운 여유로 대상을 비판할 수 있는 심리적 거리가 생길 때 나온다고 합니다. 예사 웃음으로 얼굴의 표정 변화와 목구멍을 거듭 울리는 소리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웃음'(laughtel)은 호흡의 변화를 수반하며, 반사행동이지만 명백한 생물학적 목적이 없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웃음'은 여분의 반사행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유일한 기능은 긴장에서의 해방을 말하기도 합니다.

웃음은 일정 조건이 만족될 때 15개의 안면근육이 수축하면서 나타나는 움직임입니다. 웃음이 다른 일반적인 생체운동과 특별히 구분되는 점은,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웃음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웃음'으로 어지러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근대 이전의 생각이며, 현대에는 웃음이 인간의 수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하니, 하루 한 번 웃으면서 수명을 늘려 봅시다.

필자의 어린 시절, 교인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매우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 세상에서 지치고 배고프고 고단한 삶 가운데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자체가 행복이고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일 아침에는 엄청나게 바쁩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식사를 빨리 마치고, 설거지가 끝나면 옷을 다리고, 하나밖에 없는 거울 앞에 앉아 서로 다퉈 가며 자신의 모습을 단장하려고 야단이었습니다. 얼굴에는 '동동 구리무'를 바르며, 교회에 가지고 갈 헌금이 구겨지면 다리미질하는 이에게 부탁하여 다리고는 성경책에 끼워 넣고 교회로 출발합니다.

교회 철대문 입구에는 안내원 집사님들이 '웃음' 가득히 초승달 같은 입을 벌리고 손을 붙잡아 주며 환영하십니다. 마치 이산가족을 만나는 심정으로 감동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 같습니다. 악수를 나누거나 펄펄 뛰기까지 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집안의 대소사부터 어르신들의 안부, 자식들 이야기 등 한 집안 식구처럼 다 쏟아놓는 모습은 이웃 비신자들에게도 부러움을 샀습니다.

교회에 나오기 전날에는 미리 옆집 뒷집 안집 등에 "함께 교회 가자"며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고 옵니다. 당시는 전화도 거의 없었던 터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광고를 해야 했습니다. 아침 일찍 대문을 나서는 순간, 동네가 시끌벅적 요란합니다. 교인들이 옆구리에 빨간 성경책을 끼고 가는 그 모습이 바로 전도였습니다. 집안에 선물이 들어오거나 잔치를 하면, 그리고 음식을 장만하면, 꼭 이웃들에게 나눠 주는 아름다운 섬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 교인들은 이웃을 등한시하고, 섬기고 나누는 일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한 모습을 볼 때 안타까울 뿐입니다. 게다가 층간소음이나 옆집·아랫집과의 관계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고 싸우는 모습이 정말 한심합니다. 층간소음이라면 얼마든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교인으로서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체면과 자존심만 앞세우면 안 됩니다. 좀 양보하고, 또 그 사람을 초청해서 얼마든지 대화로 풀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술을 좋아한다면 과감히 포장마차에 함께 가서 술 한 잔 정도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술 한 잔 안 하고 내내 침묵하고 다투는 것보다, 한 잔 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면 그런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인이니 술 먹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하십시오.

꼭 술을 먹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술로 해결할 수 있으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깊은 심령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만나시기 전에 기도하면서 해결 방법을 주님과 의논하시면 결코 평화를 깨는 방법은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안내를 하시는 분들, 어찌 그리 '웃음'이 없나요? 많은 교회를 다녀 보면, 요즘엔 한결같이 미소가 없습니다. 그날 순서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인들도 매일 만나지만 친절하게 웃으며 대화하는데, 교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얼굴들에게 주님 모시듯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웃음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직분으로 '웃음'을 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할 때, 따뜻하고 행복한 '웃음'이 터지는 것입니다. '웃음'은 여름엔 청량제, 겨울엔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따스한 입김입니다. 입가의 미소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성격에 따라 '웃음'이 적고 많은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식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웃음'입니다. '웃음'에는 편가르기도, 내 편 네 편도 없습니다. '웃음' 자체가 평화요 행복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주님이라는 최고의 웃음을 마음속에 품고 있음에도, 이를 외면하고 다른 곳에서 웃음을 누리려 하고 있음을 볼 때 심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웃음에는 빈부의 차이가 없습니다. 웃음에는 직위 차이도 없습니다. 웃음에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전환해 주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도 있고, '칭찬에는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전도회와 남선교회, 그리고 많은 기관들의 움직임 속에 '웃음'이 없다면, 결코 은혜가 없습니다. 모든 기관들의 부흥 발전을 위한 친목에는 반드시 화목한 '웃음'이 전제돼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앙생활 속에 늘 가슴의 온기가 있어 이를 내뿜어야 합니다. 뿜어 나오는 열기가 가득할 때 비로소 '웃음'의 도가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장로인데, 안수집사인데, 내가 권사인데' 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평신도와 함께 어우러져 웃을 수 있는 자세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어우러짐은 나를 낮추고, 내 것만 주장하지 않으며, 서로의 애로를 들어줄 수 있는 귀와 마음이 열려야 가능합니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유머를 하시면 모두들 한바탕 웃습니다. 물론 설교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참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설교할 때만이 가득할 것이 아니라, 성도 모두 늘 웃을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당회원들의 입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성도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늘 성도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함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는 점점 더 언덕 아래로 깊숙이 추락할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이웃과 사업장과 직장에서, 웃음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앞장서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또 다시 기독교는 외면당할 것입니다. '웃음'을 재탄생시켜 모범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웃음'에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하면서, 그들이 필요할 때 적극 도움을 줍시다. 그 도움에는 '웃음'의 꽃과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꼭 물질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보다 강력한 무기인 '웃음'으로 만사형통의 은혜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