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 제52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가 4일 아침 과천소망교회(담임 장현승 목사)에서 '북한 인권과 독일교회 사례'를 주제로 열렸다.

사회자 김영한 박사의 개회사로 시작된 발표회에서는 허문영 교수(통일연구원)와 정일웅 박사(총신대 전 총장), 박경서 교수(동국대 석좌)가 발표와 토론을, 차영배 박사(총신대 전 총장)가 종합을, 이영엽 목사(기독교학술원 이사장)가 축도를 맡았다. 앞서 기도회 설교는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가 전했다.

먼저 '서독교회의 동독 인권 정책'을 제목으로 발표한 허문영 교수는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에 의해 건설된 베를린장벽은 서독의 무력함을 노정하는 정치적 사건이었으나, 서독 정부의 통일 정책을 질적으로 변화시켰다"며 "장벽 건설 이전 서독의 통일 정책은 주로 지정학적 차원에서 논의됐지만, 건설 이후 그것은 인권 정책으로 귀결됐다. 왜냐하면 베를린장벽 건설은 동독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작업을 의미했고, (이로 인해) 동독의 비인권적인 체제는 종식돼야 한다는 합의가 나오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허 교수는 "서독교회의 동독 인권 정책은 동독교회 지원 사업과 유기적 관계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그 유형을 △동독교회 지원 목적의 원자재 공급 △인도주의적(정치범 석방, 이산가족 상봉) 원자재 공급 △서독 가톨릭교회에 의한 지원으로 꼽았다.

특히 "동독에서 인권 침해와 독재에 대한 교회의 저항은 매우 중요했고, 서독교회는 재정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지원했다"며 "동독교회는 일정한 자율성(Autonom)을 확보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적 공간으로, 서독사회와의 연결 통로였다"고 했다.

그는 "동독 주민들의 92%가 기독교 또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동독 사회에서 교회는 동독 정권에 협력하는 동시에 저항세력으로 존재하며 이중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며 "서독교회는 동독교회를 통해 동독 주민 탄압 관련 정보를 획득해 전파했다"고 했다.

허 교수는 "결국 동독교회 목사들은 1989년 발생한 동독의 평화혁명과 반정부운동의 상징적 인물들이 됐다"면서 "서독교회의 동독교회 지원은 동독교회 활동을 활성화하고, 동독 평화혁명의 근거지가 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독교회가 하나돼 한마음으로 독일개신교회협의회(EKD) 산하 디아코니(Diakonie)를 통해 동독교회 지원과 인권운동 전개를 했던 것처럼, 사분오열된 한국교회도 연합과 일치를 이뤄야 하고 단일화된 창구로 북한선교와 복음통일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어 '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와 동독의 민주화'를 제목으로 발표한 정일웅 박사는 "동서독 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 통일에 가장 모범적인 모델임이 분명하다"며 "이는 독일의 통일이 전쟁에 의한 것이 아닌 평화통일(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동서독교회의 노력이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동서독교회의 통일 노력은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모델"이라고 했다.

정 박사는 "오랜 기간(1980~1989) 시행된 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는 동독(라이프치히)시민들에게 먼저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줬다"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대화뿐 아니라, 사람과의 대화에서 공산당 정부의 불의와 인권탄압적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을 일깨운 것이다. 그것이 비폭력인 평화의 정신이었다"고 했다.

또 "지역교회가 연합해 시행한 기도회는 개방적이었고, 독재 정치 체제하에서의 비인간적이며 부당한 모든 문제들을 함께 논의함으로써 민주적인 의식을 일깨우고 해결 방안을 찾는 일까지도 모색하게 했던 것"이라며 "교회의 이러한 개방성은 국가 권력에게서 개인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유지하게 했다"고 했다.

정 박사는 "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가 보여 준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함께 비폭력의 정신을 한국교회도 이어받아, 북한의 폭력에 맞서는 평화기도회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며 "아울러 북한 땅에서도 평화기도회가 시작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끝으로 '서독 정부의 동독 인권 정책(평화의 사도로 부름받은 우리)'를 제목으로 발표한 박경서 교수는 "서독교회는 정부의 묵인하에 당시 스트투가르트에 위치한 Brot fuer die Welt(세계를 위한 빵 기구)를 통해, 그리고 동독의 비밀경찰의 협조로 1963년부터 1989년 통일이 성사되기까지 26년 동안 총 15억 달러에 달하는 현금과 생활필수품을 동독 시민들에게 공급했다"며 "그리고 약 3만 명의, 자유를 원하는 동독의 정치 망명객들을 서독에 안착시켜,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끽토록 했다"고 했다.

그는 "정치범 1인당 10만 마르크였으니, 당시 서독 국민의 소득 10배에 해당하는 고액을 교회는 지불하고 평화와 인권의 신앙고백을 실천했다"며 "그 후 이 자유를 위해 서독에 온 동독인들은 25만 명에 이르렀다. 모든 언론은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고, 주간지인 Spiegel마저도 묵인했다. 동독인들이 안정돼야 동서독 전체에 평화가 정착된다는 신앙고백과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우리는 비록 서로 상황은 다르지만, 독일의 통일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며 "독일 민족의 통일 문제는 정권을 초월해 추진됐기에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변하지 않았고, 분단에서 통일까지 여야가 같이 상의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이를 동독으로까지 가져가서 협상했다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략질당하지 않는 통일, 인권·평화 문제들은 여야가 같이 손잡고 추진해야 한다. 이상의 문제들은 정쟁의 대상이 아니어야 함을 우리는 독일에서 배워야 할 것"이라며 "진정한 평화는 무력이나 전쟁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류의 3천 년 역사에서 배웠다. 평화는 전부는 아니나,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표에 앞서 개회사한 김영한 박사는 "서독교회는 동독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동독과 서독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며 "독일이 동서로 나뉜 뒤, 서독 개신교연합회는 동독에 수감돼 있던 성직자 150여 명에 대해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서독 개신교연합회는 동독교회 쪽에 사람을 넣어, 성직자를 억류하는 것은 동독 사회의 인상을 나쁘게 만들 뿐이라고 설득했다. 그리하여 1962년 트럭 석 대분 비료와 옥수수, 석탄을 넘겨 주고 성직자들을 데려왔다. 동서독 사이에 처음으로 '몸값 거래'가 성사되자, 이듬해 1963년에는 서독 정부가 나섰다. 부모는 서독에 있는데도 동독에 따로 남겨진 어린이 20명과 정치범 8명이 서독으로 넘어 왔고, 현금 32만 마르크(당시 1억 7000만 원)가 지불됐다"고 했다.

이어 "서독 정부는 1962년부터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7년 동안 동독 정치범 3만 3755명과 가족 25만여 명을 데려 왔다"며 "몸값으로 34억 6400만 마르크가 들었다. 당시 환율로 1조 8400억 원이다. 이 정치범 석방 거래를 '돈 주고 자유를 산다'는 뜻에서 '프라이카우프(Freikauf)'라고 했다. 동독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대한 서독 정부의 이러한 개선 요구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은 서독 정부를 신뢰했고,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의 상황이 다가 왔을 때 주민 투표에서 서슴지 않고 서독과 합병하겠다고 찬성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