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 전도(傳道)라는 것이 무엇인가? 한자로 보면 전할 전(傳)자에 길 도(道)자로 되어있어 '도를 전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전도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전도(傳道)라는 한자 속에는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계시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여러가지 방법들을 고안하여 전도를 시도하는데, 이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안하는 방법들은 대부분이 비성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도를 하되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법대로 전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못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전도의 방법은 무엇인가? 신중히 들어보라. '전도(傳道)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한자가 담고있지 않은 전도의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 동사는 헬라어로 케루쏘(κηρύσσω)인데, 그 뜻은 '선포하다'이다. 이것이 전도의 방법이다. 전도의 방법은 선포이다. 선포가 무슨 뜻인가? 외치는 것이다. 타협하는 것도 아니고,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며, 굽실대는 것도 아니다.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다. 즉 전도란 유일한 길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럴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예정된 자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비유의 껍데기: 이러한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막 4:26~29을 보자.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1.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음: 한 농부가 있다. 그는 씨앗을 뿌리고 있다. "뿌리다"고 번역된 헬라어(βάλλω)는 '던지다'는 뜻이다. 농부는 공을 던지듯이 씨앗을 밭에다가 던지고 있다.
2.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 지를 알지 못함: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농부가 밭에다가 씨앗을 던졌기는 던졌는데, 그 다음부터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도무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나? 참으로 무책임한 농부가 아닌가? 농부라면 씨앗을 뿌린 후에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던가? 아니다.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 없다. 왜? 씨앗을 던지는 것은 농부의 역량에 달려 있지만, 그 씨앗을 자라게 하는 것은 그의 역량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자세히 이 구절을 분석해 보겠다. 27절을 헬라어로 보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자 한 요점이 무엇인지가 금새 들어난다. 밤낮 "자고 깨다(καθεύδῃ καὶ ἐγείρηται)"에 사용된 두개의 동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씨가 "나서 자라다(βλαστᾷ καὶ μηκύνηται)"에 사용된 두개의 동사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농부가 "알지 못한다(οἶδεν)"에 사용된 동사는 완료형이다. 이러한 동사의 시제를 고려하여 본문을 쉽게 해석하자면 이렇다.
농부는 씨앗을 뿌린 후에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는 일을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한다. 그리고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자라난다. 농부가 현재 진행형으로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씨앗도 현재 진행형으로 점점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농부는 이러한 과정을 완료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농부는 씨앗이 뿌려진 그 순간부터 씨앗이 자라나는 모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농부는 씨앗을 한 번 뿌린 후에는 계속 자고 일어나기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앗은 무럭 무럭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씨앗을 뿌린 후에는 씨앗을 위하여 뭣 좀 해야지 씨앗이 자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씨앗은 잘 자라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셨는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농부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을? 씨앗이 왜, 어떻게 자라는지를! 씨앗을 뿌리는 것은 농부의 역량에 달려 있지만, 그 씨앗이 자라게 하는 것은 농부의 역량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3.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그래도 괜찮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땅이 무엇을 하는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더 정확한 통사론적 해석은 '땅 속에 심긴 씨앗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αὐτομάτη ἡ γῆ καρποφορεῖ)'이다. 농부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씨앗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에 씨앗이 자라나는 것이다. 농부의 도움이 없어도 씨앗이 스스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왜? 뿌려진 씨앗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씨앗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게 아니다. 땅이 씨앗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것도 아니다. 씨앗 자체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뿌려진 씨앗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싹을 올리면서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까지 가게 되고, 결국 추수때에 "열매가 익[어]... 낫"을 통하여 거두어 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유의 핵심이다. 이제는 비유 속으로 한꺼풀 더 깊이 들어가 비유 속의 알맹이를 풀어보도록 하자.
비유의 알맹이: (1) 농부는 전도를 하는 자를 나타내고, (2)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며, (3) 땅은 전도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고, (4) 씨앗을 땅에 뿌린다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같고 본문 26절부터 다시 보자.
1.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라고 되어있다. 전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뿌린다. 이전에 알아보았듯이, "뿌리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던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전도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사다가 바치고, 일을 도와주고, 굽실대고, 아양을 떨면서 전도를 하는게 아니다. 그들의 마음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던지는게 전도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전도의 방법을 무시하고 "합리적 방법"으로 전도하려한다. 쉽게 말하자면 "일단 불신자의 마음을 열고 나서 복음을 전하자"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선 날씨 이야기 먼저 하고, 자녀 이야기 먼저 하며, 정치나 경제이야기로 서로의 마음을 열고 나서, 기회가 되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괜히 예수님 이야기 먼저 했다가는 그의 심기를 건들이고, 대화의 진전이 없어 마음의 문을 닫게할 수 있으니 일단 그들의 마음을 열고나서 전도하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지극히도 세상적인 합리주의적 사고에서 왔음을 말씀드린다. 내 말이 맞는가 솔직히 판단해보라.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소유한 전도자들이 흔히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연다"는 표현은 전도를 받는 자들과 일단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 복음을 전하면 효과적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말씀드린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게 아니다. 그저 세상적인 일에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말이지 복음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도를 해 본 분들은 알 것이다.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맞장구를 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날씨에 공감대를 형성하며, 자녀 문제에 공감대를 형성해도 복음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마음을 닫아버리고 얼굴을 붉히는 자들이 있지 않던가? 간과 쓸개까지도 다 내줄 것처럼 하다가도 복음이 들어가는 순간 마음을 닫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정반대로, 복음을 전할 때에는 받아들이지 않다가, 나중에 그 말씀을 받아들여 구원의 반열에 오르는 자들도 있지 않던가? 저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이 믿지 않고 교회 안나올 것 같은 사람인데 구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세상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 굳게 닫혀있는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은 세상적인 공감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에 한 목사님께서 쓰신 글을 읽고 참 마음이 아팠다. 그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쓰셨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몰상식하고 무식한 일이다." 그대신 "날씨 이야기를 하고, 경제 이야기를 하고, 자녀 이야기 등을 먼저 하여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가슴이 이팠다. 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예수님 이야기 하는 것이 무식한 일인가? 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 이야기 하는 것이 몰상식한 일인가? 이것이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물론 분위기도 중요하고, 친분 관계도 중요하다. 세상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의 말에 맞장구 쳐 줄 수 있는 아량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의 시작은 예수님이요, 전도의 중간도 예수님이며, 전도의 끝도 예수님이여만 한다. 사도 바울을 보라. 그가 불신자들에게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그와 공감대를 형상한 후 복음을 전했나? 베드로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전도를 한 적이 있나? 없다. 이들은 항상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연결되어 예수님으로 끝나는 전도를 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던짐으로써 전도를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마음을 여는 힘과,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7절은 증거한다.
2.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농부는 씨앗을 뿌리기만 했는데, 그 씨앗이 잘 자란다. 이처럼 우리도 말씀을 던지기만 하면, 그 말씀은 잘 자라나는 것이다. 왜? 우리가 던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힘이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던지기만 하며, 그 말씀이 그 후에 일하는 것이다. 스펄전이 말했다. "The Word of God is like a lion, 하나님의 말씀은 사자와 같다! We don't need to defend it or advocate it! 그래서 그 말씀을 보호하거나 변호할 필요가 없다! We just need to release it! 그저 그 말씀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가? 우리가 갖고 있는 전도의 기술이나 테크닉에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는게 아니다! 우리가 던지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이다. 본문에 있는 농부를 보라. 그는 씨앗에다가 양념을 하지 않았다. 색을 칠하지도 않았다. 그 씨앗을 있는 그대로 던졌다. 그랬더니 그 씨앗이 스스로 자란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양념을 하고, 색을 칠하고, 굽고, 삶고, 찌고, 다질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던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28~29절은 말한다.
3.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땅에 있는 씨앗이 스스로 열매를 맺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며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을 맺고, 결국 열매까지 간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에 우리가 던지기만 하면 저절로 자라는 것이다. 고전 1:21는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구절을 잘 들어보라. 우리가 볼 적에는 전도만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전도를 했으면 그가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관리"를 해 주어야만 할 것 같다. 가끔씩 찾아가서 밥도 사주고, 일도 거들어 주면서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엉덩이를 두드려 주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내말을 오해하지 말라. 물론 새신자를 찾아가 밥사주고, 일도 거들어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새신자를 자라게 하기 위한 관리"라는 명목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은 코이노이아적 친교의 명목으로는 해도 좋지만, 케루쏘 뒤에 반드시 와야만하는 새신자 관리차원으로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새신자를 자라게 하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질문: 이쯤에서 여러분은 질문 할 수 있다.
질문 1: "고전 3:6에 보면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도 심은 다음에는 물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우리는 심은 후에 물도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질문하겠다. 물을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도를 찾아가 밥도 사주고, 일도 거들어주고, 응석도 받아주는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합리주의자들의 잘못된 해석이다. 그것을 물을 주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라. 그렇게 잘못된 해석을 하기에 잘못된 새신자 관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는 것은 무엇이고 물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주라. 하나님의 말씀은 내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케리그마(κήρυγμα)와 디다케(διδαχή)이다. 케리그마는 예수님은 누구이시고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계시로써 불신자를 새신자로 만드는 말씀이고, 디다케는 그 밖의 계시로써 새신자를 아이를 거쳐 청년, 장성한 자, 그리고 영적 군사로 만드는 말씀이다. 여기에 지혜가 있다. 사도 바울이 뿌린 씨앗은 케리그마를 말하고, 아볼로가 준 물은 디다케를 말한다. 이 두 가지 말씀을 통하여 죽은 자는 살게되고 자라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케리그마 말씀만이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디다케 말씀만이 사람을 자라게 한다. 즉, 말씀으로 사람이 살고, 말씀으로 사람이 자라는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명심하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에는 이미 생명이 들어가 있기에 우리는 선포만 하면 된다. 그러면 말씀이 예정된 자들의 마음밭에 떨어져 열매까지 가는 것이다. 본문속의 농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굽고, 삶고, 찌고, 끓인후 양념을 뿌린 후 던진게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던졌다. 그 사람이 받던지, 안받던지 신경쓰지 않고 던졌다. 그랬더니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스스로 자라난 것이다. 복음을 전한자가 새신자를 관리했기 때문에 씨앗이 자라난게 아니다!
질문 2: "그러다가 그가 복음을 받지 않으면 어쩌지요?"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사람이 받던지 받지 않던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다. 그가 예정을 받은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받은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버릴 것이다. 고로 우리는 말씀을 전할 때 상대방이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를 염려해서는 안되고,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예정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리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어떠한 밭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그 때, 말씀이 그들을 나누는 것이다. 고후 2:15~16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를 통하여 구원 받는 자들은 생명으로부터 생명으로 이르게 되고, 망하는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사망으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전도의 열매이다. 전도를 통하여 예정된 자들은 생명으로 오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사망으로 간다. 고로 우리는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위축되지말고 당당하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가장 자랑스럽고 확실하며 최고의 가치가 있는 능력이다. 나는 복음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절대 복음을 비굴하게 전하지 않는다. 자랑스럽게 전한다.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 교회를 찾아와 필자에게 교리의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에도 나는 그의 "친구"가 된후 복음을 팔지 않았다. 앞에 성경 펴놓고 함께 해석하며 복음을 던졌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을 바꾸셨다. 안식일 교도가 우리 교회를 찾아와 교리의 도전장을 내놓았을 적에도 그의 "마음을 연 후"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나는 전했고, 내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속에서 역사했다. 복음을 던졌더니, 복음이 알아서 역사했다. 받을 사람은 받았고, 버릴 사람은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정이 전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이다.
맺으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하려고 할 때, 추해진다. 나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내 전도의 테그닉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게 아니다. 내 전도의 모양새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전하는 말씀이 사람을 구한다. 고로, 전도하는 자들이 가장 조심해야할 착각은 "내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내가 내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데, 어찌 남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요, 그 말씀의 역할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내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에 전도의 모습이 일그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선포함으로 전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Ζῶν γὰρ ὁ λόγος τοῦ θεοῦ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καὶ ἐνεργὴς [능력이 있다]
καὶ τομώτερος ὑπὲρ πᾶσαν μάχαιραν δίστομον [모든 양날검 보다 더 날카롭다!]
καὶ διϊκνούμενος ἄχρι μερισμοῦ ψυχῆς [그래서 혼을 찔러 쪼갠다]
καὶ πνεύματος, [영혼을 찔러 쪼갠다]
ἁρμῶν τε καὶ μυελῶν [관절과 골수도 찔러 쪼갠다]
καὶ κριτικὸς ἐνθυμήσεων καὶ ἐννοιῶν καρδίας· [그리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분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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