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1907년 대부흥의 물결이 2, 3년 지나자 부흥의 열기가 차차 식기 시작했다. 교인들의 열성이 기울기 시작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일제가 기왕에 시작한 한국 식민화를 가속했다. 급기야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 병탄하여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른 사회적 불안과 모든 사람의 좌절을 보면서, 교회는 이런 때 낙담하고 있는 백성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을 일깨웠다. 이에 따라 부흥운동이 재개됐는데 이 운동이 ‘백만명구령운동’(The Million Souls for Christ)이다.

이 운동은 1909년 개성에서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M.B.Stokes), 갬블(F.K.Gamble), 리드(Miss W.T.Reid) 3인 회동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한국 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위해 사경회와 기도회를 일주일 동안 갖기로 협의했다. 이들은 한국 교인 몇 사람과 함께 산상기도회를 개최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1909년 9월에 개최한 남감리교회 연차대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로 특별 집회를 열 것을 요청했다. 연차대회가 폐회된 후 바로 열렸던 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위 세 선교사는 공의회 전도 목표 채택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백만 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였다. 여기서 백만 명 구령운동이 정식으로 출범한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불과 몇 만 정도에 불과했던 때 백만 명은 확실히 실현하기 어려운 숫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전 국민을 상대로 전도운동을 벌이기 위해 그런 목표를 정하고 추진했다.

이때 마침 세계를 순회하며 전도 강연을 하던 부흥사였던 챕맨(Wilbur Chapman)과 알렉산더(Charles M.Alexander) 일행이 내한했다. 이들은 즉시 백만 명 구령운동에 동참키로 하고, 먼저 선교사들을 상대로 5일 동안 전도 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떠났으나 일행 중 한 사람인 데이비스(George T.Davis)는 한국에 남아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 집회를 계속했다. 일제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긴 민족은 경상도의 한 관리가 말한 대로, “지금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달리 아무 도리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 당시 많은 사람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1910년 선천에서 모인 장로회 제4회 독노회에서도 백만 명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의결했다. 각 교회가 10월 24일부터 한 주간 특별 새벽기도회로 모이기로 결의하고 7 대리회에서 특별위원을 선정하여 이 일을 추진케 했다. 이 날은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지 꼭 20일이 지난 때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 전도를 위해 남녀노소, 학생과 평신도, 교역자들이 전심전력하여 목표 구현을 위해 노력한 전국적 운동이다.

이 운동 기간 동안 나타난 특이한 현상이 하나 있다. 이는 가난한 교인들이 이 운동을 위해 물질적으로 헌금할 수 없어, 날(日)을 바치는 소위 ‘날연보’(日捐補, Day Offering)가 시작된 일이다. 옛날에는 헌금을 연보라 했는데, 당시 연보 즉 헌금을 할 수 없었던 가난한 교인들이 돈이 없어 유급 전도사를 파송할 수 없는 곳에서 신자들 자신이 생활 가운데 일정한 시간을 내어 쪽복음서와 전도 문서로 전도했다. 이 운동은 신자들 간에 큰 호응을 얻어 평양에서만 1천 명 신자가 연 2만 2천 일을 연보했고, 황해도 재령에서는 1만 일이 연보됐다. 비록 북쪽에서처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남부 지방에서도 이 운동이 일어나 군산 지방에서 850날이, 전주에서는 3,349날이 연보됐다. 이렇게 연보된 날 수가 이 기간 동안 도합 10만 날이 넘었다.

이 날연보에 대해 선교사들이 영문으로 발간했던 월간지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에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됐다. “고되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한국 사람들은 도급 10만 날을 이 사업에 바쳤는데 지난 겨울에 개인전도에 사용한 일수는 7만 6천 날이고, 금년 가을에도 수백 명의 한인 전도인들이 가가호호를 심방하는 활동과, 대 집회에 출석한 구도(求道)인들과의 개인적 접촉을 위해 한 달을 온통 바쳤다. 수백 만 매의 전도지와 한인 신자들이 대금을 내고 불신 동포에게 70만 권의 마가복음을 무료로 배부하면서 복음서를 읽고 믿으라는 간곡한 권고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한국인 가정 치고 심방 받지 아니한 가정이 거의 없었고 심방의 결과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한국인이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다.”

위의 글은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 일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며, 시간과 물질을 바쳤는지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연말에 그 결과를 정리했을 때 결신자 통계는 그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음을 알게 됐다. 물론 백만 명이 다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 결과는 기대한 만큼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에서 사역하던 북장로교회 베어드(Willam Baird) 선교사는 “온 교회가 굳센 믿음과 유례없는 열성으로 이 운동에 가담했다. 복음을 이처럼 전국적으로 전파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도록 권유를 받았고, 또한 신자가 될 뜻을 표시하기도 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모든 일이 다 알려지게 되면 백만 명 이상의 영혼이 이번 백만 명 신자화운동이 있던 기간에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리라고 믿는다."고 피력했다. 그의 말과 같이 백만 명이 결신은 하지 못했다 해도, 백만 명이 복음의 소식을 들었다면, 언젠가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전도를 계속해야 될 것을 확신했다. 백만 명 구령운동은 민족 복음화의 첫 걸음이었고, 이 정신은 후대에도 계속 그 맥을 이어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