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기독교권이었던 유럽이 그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그곳에서 이슬람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슬람은 서쪽에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늘날 그 예언이 실현되듯이 이슬람은 유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유럽은 콘스탄틴 대제의 공인 이후 기독교 역사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빈 등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곳도, 개신교가 시작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기독교의 중심이 약 400년 동안 중동이었다면, 그 이후는 서구 유럽이었다. 유럽의 무슬림 인구는 1970년 720만 명에서 1990년대에는 1,300만 명으로, 2000년에는 3,700만 명으로 늘어났다. 2007년을 기준으로 전체 유럽(동유럽 포함)에는 약 5,300만 명의 이슬람 인구가 있으며, 이 중 EU(유럽연합) 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은 약 1,600만 명에 달한다.
1989년 7월 11일 아가 칸(Aga Khan, 이스마엘파 무슬림들의 영적인 리더)은 대영박물관의 존 아디스(John Addis) 이슬람 갤러리 개관식에서 "유럽은 이슬람 문화와 서구의 중요한 만남의 장이다.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장벽이 지금 무너지기 시작했다. 곧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가 한 말을 풀이하면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에 이민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 1950, 60년대, 그리고 7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이슬람이 이렇게 성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치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이슬람이 유럽의 '제2의 종교'"라고 상투적으로 말하면서 자신들이 관대한 것처럼 표현했다. 덴마크의 종교학자 앤더스(Anders Jerichow)는 "우리는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 이민자들이 30%를 차지하는데도, 공청회를 개최하면 이슬람에 대한 부분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슬람을 유럽의 제2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과소평가다. 실제로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은 유럽의 제2의 종교가 아니라 제1의 종교이다. 몇몇 서유럽 국가에서 교회와 모스크에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비슷하다. 그러나 전체 유럽의 상황을 보면 모스크에 다니는 비율이 훨씬 높다.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유럽이 아랍 세계의 전초기지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런 일까지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럽은 서서히 이슬람화되어가고 있다.
유럽에서 이슬람의 존재가 드러난 사건은, 1989년 영국에서 인도 출신의 소설가인 살만 루시디가 '악마의 시'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시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해서, 유럽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이 시위를 벌이고 루시디에 대한 살해 협박을 했다. 1989년은 프랑스 이슬람에게 있어서 분수령이었다. 3명의 중학생들이 교실에서 베일을 썼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를 '베일 사건'이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에서 막 조직되기 시작한 이슬람 단체들이 이 문제를 전략적으로 사회 문제화시켰다.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열차 폭탄테러로 인하여 192명이 숨지고 1,24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어서 영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무슬림 2세들에 의하여 벌어진 2005년 7월 7일 런던 폭탄테러로 56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4년 11월 네덜란드의 감독인 데오 반 고흐(Theo van Gogh)가 '굴종'(Submission)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모로코 무슬림 2세 무함마드 부바리(Mohammsd Bouyeri)에 의하여 살해됐다. 2005년 9월 덴마크 언론(Jyllands-Posten)의 무함마드 만평 사건으로 인하여, 중동에서는 덴마크 대사관 테러 및 방화가 발생하고 이슬람 국가들은 덴마크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 논란은 전 유럽의 무슬림들을 자극하였으며, 이슬람에 공격적인 유럽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었다. 2015년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만평이 무함마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잡지사의 편집장을 비롯한 12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13일 금요일에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로 130명이 사망하고 340명이 부상을 당했다. 부상자 가운데는 중상자가 많아,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슬람과 유럽은 서로 적대적이며 배타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어떻게 해결될지에 대한 답은 절망적이다. 독일에 거주하는 시리아 출신 학자 바삼 티비(Bassam Tibi)는 버나드 루이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유럽은 지금 이슬람이 유럽화되든지 유럽이 이슬람화되어야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유럽 이슬람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몇 도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런던(London)
이슬람은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다. 영국 최초의 모스크는 1889년 런던의 워킹에 세워진 샤자한 모스크(Shah Jahan)였다. 1887년 인도에서 온 무슬림들이 워킹 지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모스크를 세웠다. 이는 영국만이 아니라 북유럽 최초의 모스크였다. 런던 무슬림들 중 40%가 동부에 거주한다. 런던에 처음으로 정착한 무슬림들은 19세기 소말리아와 예멘 출신의 항해사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재건을 위하여 영연방과 식민지 국가에서 노동자 신분으로 입국했다. 처음에 많이 이주한 이들은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등 출신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예멘, 소말리아, 터키 출신들이 영국에 들어와 거대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영국 흑인들 가운데 9%가 무슬림이다(2001년부터 실행하는 영국 인구조사에는 종교 문항을 포함시키고 있다). 영국 흑인 사이에 기독교 다음으로 많은 종교가 이슬람이다. 흑인이 50% 거주하는 런던에는 13%가 흑인 무슬림이다. 영국 무슬림의 3분의 1은 중동이나 아시아 출신이 아니다. 1976년 런던에서 이슬람교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무슬림들은 런던만 손에 넣으면 서방세계 전체를 장악하기 어렵지 않다고 장담했다. 그 후 그들은 10년 내에 런던에 1,500개의 이슬람 사원을 세웠고, 기독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사용하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크리스마스 축제를 열고, 이슬람을 국립학교 교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2. 파리(Paris)
파리에 살고 있는 무슬림은 프랑스 전체 무슬림의 38%로 추산된다.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및 서부아프리카와 터키, 동남아시아, 중동 및 사하라 이남 무슬림들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파리 사원(Paris Grand Mosque)의 자료에 따르면, 파리에 75개의 모스크가 존재하고 많은 기도처소들이 있다. 파리에 이슬람 자선단체와 이슬람 의회, 각종파별 단체 협의회 등이 존재한다. 파리의 무슬림들은 대부분 북동부에 떨어져 있으며, 지리학적 분리는 그들에게 불만과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2005년 11월에 파리 교외의 빈민가인 클리쉬-수-브와(lichy-sous-Bois)에서 범죄 혐의를 받던 북부아프리카 이민자 2세 소년 두 명이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하다가 감전사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송전소의 담을 넘다가 변압기에 떨어져 사고를 당했다. 이로 인하여 북부아프리카 이주민 2세 청소년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두 달 동안 350개 도시에서 300여 채의 건물과 6,400대의 차량이 불타는 등 혼란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 기간 중에 61세 노인이 청소년들의 폭행으로 사망하고 주민, 경찰관, 소방관 115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3. 암스테르담(Amsterdam)
네덜란드의 무슬림들은 대부분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며, 도시 전체 인구의 13%를 차지한다. 네덜란드 열린사회연구소(Open Socity Institute Monitoring and Advocacy Programme)에 따르면, 암스테르담에 사는 무슬림들 중에는 모로코인 6만 3천 명, 터키인 3만 8천 명, 수리남 무슬림 7만 천 명 등 75만 명이다. 암스테르담에 55개의 모스크와 많은 기도처소들이 존재하며, 2005년에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여성 전용 모스크가 문을 열었다. 이는 많은 무슬림들에게 논란이 되었다. 무슬림 공동체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전통적인 관습에 위배된다는 반대 여론 때문이었다. 무슬림들 사이에 여성 전용 모스크는 이슬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며 이교도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전 세계의 모스크는 남성을 위한 전유물이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 사람들 중 모스크의 이슬람 예배에 참석하는 남성은 15%지만 여성은 6%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에는 이슬람 문화센터·학교·청년조직 등 무슬림을 위한 다양한 문화공간이 만들어졌다.
4. 프랑크프루트(Frankfurt)
독일은 서유럽에서 프랑스 다음으로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라다. 해외 출생 이민자가 전체의 12%이며, 대략 400만 명의 터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주민의 70%가 터키인들이며, 그 중 80%가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는 이유는, 독일의 보수 정치인들이 최근까지도 미국과 같은 '이민의 나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혈통주의에 대한 집착과 향수 때문이었다. 터키인들은 1960년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유럽을 재건하기 위해 세운 원조계획인 '마셜플랜'(Marshall Plan)으로 독일과 터키가 맺은 노동이민협정에 따라 이주노동자(Gastarbeiter)로 독일에 왔다. 이주노동자들은 베를린, 쾰른, 슈투트가르트, 도르트문트, 에센, 뒤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다름슈타트, 뮌헨과 같은 산업지대에 정착하였다. 프랑크푸르트는 이제 독일에서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게 유럽에서 이슬람 인구는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30년간 유럽의 이슬람 인구는 3배로 증가했으며, 2020년에는 다시 지금의 2배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도 9.11테러 이전에 이슬람 인구 증가는 약 4%였는데 그 이후로 증가폭이 커졌다. 그러나 이슬람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발생되는 문제들 때문에 다문화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문화 정책을 국가의 공식 정책으로 삼고 있는 한국에, 유럽의 이슬람화는 교훈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