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가셨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멍한 데, 자꾸 아버지에게 딱 한 번 맞아 봤던 일이 생각납니다. 정확하게 무슨 일 때문에 맞았는지 잘 기억은 없지만, 손바닥으로 저의 뒷목을 세게 내리쳤을 때 정신이 번쩍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왜 멍하게 있느냐고 한 대 때리시는 것 같아 정신을 차려봅니다.
장남으로 태어난 저를 향한 아버지의 기대는 많으셨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앞으로 중국이 열릴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저를 화교에 먼저 집어넣으신 것부터 시작해서, “영어는 기본이다.” 하시며 민병철 영어 테이프를 중학교 때부터 듣게 하셨습니다. 본인은 음악을 전공했지만, 자녀들은 어학을 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앙교육도 철저히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용돈도 십일조부터 훈련받았고, “예배는 몸이 아파도 가야 한다, 예배 가다 죽으면 순교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정예배였습니다. 너무 지루해서 몸이 비비 틀어졌지만,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주기도문으로 끝났던 가정예배가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가족이 같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본인이 환갑 되는 해에 가족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피아노 실력으로는 부족하다 하시며 피아노 잘 치는 며느리를 얻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내나 제수씨에게 면접 첫 질문은 “피아노 칠 줄 아나?”였습니다. “조금 칩니다”라는 며느리들의 대답에 속으셨고, 그나마 하나 있는 사위는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음치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환갑기념 가족콘서트는 물 건너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아쉬웠든지 외부 도움 없이 당신이 낳은 자식들로만 해보겠다 하시면서 스튜디오도 아닌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피아노 전공하는 자매 집에서 다섯 식구 가족찬양을 녹음하고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 테이프가 지금 어디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아버지 천국 가시던 날, 첫 손녀 첫사랑이라며 당신 닮아 노래를 잘한다고 기뻐하셨던 소원이가 할아버지 생각하며 헌금특송 한 것이 천국 가시는 굿바이 찬양이 되었네요. 환갑 가족콘서트는 아니었지만, 카네기홀 음악회 부럽지 않은 손녀딸의 주일예배 찬양을 들으시며 천국입성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참 멋진 분이셨습니다. See you l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