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Photo : 기독일보) 크릭사이드 교회 김칠곤 목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삶의 목적의식과 소망이 분명하여 기쁨의 항해를 한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나침판과 기름이 채워지지 아니한 보트를 타고 넓은 바다에 표류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만일 이러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대단히 삶에 큰 위기를 만나게 된다. 즉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생의 지침이 없다면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데 있어서 언제 어디에서 큰 암벽에 부닥칠지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아니하는 짙은 안개 가운데서 방향을 잃어 공포와 두려움 가지게 된다. 이것은 삶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으로 인한 좌절과 절망의 늪이라고 볼 수 있다. 기름을 싣지 아니한 보트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바다에 항해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겠 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파도가 보트를 밀어 쓸어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의 삶을 환경이 주어지는 대로 살아간다고 말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보트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 얼마든지 자신이 기름을 준비하여 항해를 할 수 있는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인생의 항해를 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믿고 인생의 삶을 어떻게 펼쳐 나가느냐에 의해 그 사람의 삶이 긍정적인 삶 혹은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 혹은 희망과 절망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로 부터 겸손히 배워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배움이라는 것은 나의 자신의 한계를 알고 새로운 세계에 나아가는데 삶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배운다는 것은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 가운데 누군가로 부터 지혜를 얻기 싫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히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가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어떤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무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언젠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 형제와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에게 교회에 다니는 것과 교회에 출석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 왔는지에 대한 질문 한적이 있었다. 그런 질문을 그 학생에게 한 것은 그래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뭔가 삶에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필자에게 대답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 아직은 나를 믿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에 하나님을 다시 한번 믿어 보지요" 이말을 듣고 필자는 충격이었다. 아직 인생을 충분히 살아 보지 아니한 십대의 생각속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의 나이에 '나는 아직도 나를 믿고 싶다.'라고 당돌하게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면서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수도 없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느 누구의 마음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그를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자신을 믿는다는 청년을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에 나가라고 권면을 해야 할지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매일 같이 생명의 양식을 아침마다 집사람과 함께 나눔을 통해 답을 얻은 적이있었다. 그것은 에스겔서 20:39절의 말씀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라 그렇게 하려거든 이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이 말의 배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포로된 삶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민족을 형성하는데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의지하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불순종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목석을 우상으로 삼아 그것들에 절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를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그 경고를 듣지 않고 마음이 너무나 돌짝 밭과 같아서 하나님으로 부터 분노를 얻게 될 것이라고 에스겔 선지자가 선포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앗수르 왕 살만에셀왕은 군대를 이끌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동안 공격을 하고 기원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우상숭배를 하게 되어 기원전 586년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기 왕 때 바벨론으로 부터 3년동안 공격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성들이 파괴되고 남 유다가 멸망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그냥 두신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 23장 1-3절을 보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한 여인에서 나은 형제라고 말을 한다. "3 그 이름의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 살렘이니라" 한 형제이지만 이들은 서로간에 원수처럼 지낸 것을 신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서로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무시하고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 삶을 산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돌 같은 마음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알 수 있다. 돌 짝 밭과 같은 마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은혜를 받고 구원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며 형제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하나님께 돌아선 때는 그들의 삶에 박해와 고통히 심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감정적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즉 이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이 편의대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상황에 의해 해석하여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토양에 복음을 제시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이러한 돌짝 밭은 초가 집 지붕 아래 마룻돌 위에 올려진 흙과 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위에 흙이 약간 있으면 씨를 뿌릴 때 감추어 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집을 나갈 때,들어 갈때 마다 밟히게 되고 바람이 불면 흙과 함께 날아가게 되고 그것을 본 새는 공중에서 날아와 씨를 먹게 된다. 이것을 볼때 하나님은 무모하게 돌짝 밭에 씨를 뿌리지 아니하실것 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돌과 같은 마음이 좋은 토양으로 바꾸어 지기를 기대 하신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도 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기다린다면 삶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자신이 누군지를 언젠가 알 것이며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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