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올 때, 한국은 이미 4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문화 속에 아무 충돌 없이 정착됐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문화와의 충돌이기도 했고, 수구파와 기득권자들이 새로 들어온 사상과 선교사들을 적대하고 질시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개신교가 한국에 선교되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다. 시기적으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될 때는 조정에 의한 천주교의 박해가 있었던 후였다. 개신교가 천주교로 오해되어 개신교를 사학(邪學)이라 박해했다. 가족 중 신앙을 받아들인 이가 있으면 호적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일은 보통 일이었다. 며느리가 믿는다고 온 가족이 그를 거의 죽을 지경까지 구타하고 머리털을 뽑아 버리기도 했다. 마침내 맨몸으로 쫓아내는 고통을 가하는 경우도 흔했다.
감리교 선교사 존스(G.H.Jones)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은 수난에 대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의 의식(儀式)에 불참하고 조상과 지방신 숭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다. 어떤 지방에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박해가 자심하다.”고 보고한다. 아펜젤러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여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글을 쓴 일도 있다.
1888년에 있었던 ‘어린이 소동(The Baby Riots)’은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됐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나와 고아들을 모아 양육했다. 그런데 일반 민중이 이를 오해하여, 선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잡아 눈알을 빼어 약을 만드는 데 쓴다. 식탁에 올리기도 하며, 외국에 노예로 팔기도 한다는 뜬소문이 떠돌았다. 이 일로 선교사 전체가 커다란 위험에 빠졌고 선교 사역이 크게 위축된 일도 있었다.
1894년 4월 평양에서는 서서히 확산돼 가는 기독교 세력을 억압하려는 음모가 획책됐다. 평양감사 민병석(閔丙奭)이 유교 수호와 서양인의 혹세무민(惑世誣民) 방지를 명분으로 박해를 가했다. 장로교인 한석진과 감리교인 김창식, 그리고 신자 수 명을 체포하여 거의 죽도록 구타하고 기독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에 평양에 주재하던 장로교 선교사 마펫(S.A.Moffett)과 감리교 선교사 홀(W.J.Hall)이 서울의 미국과 영국 공사관에 급히 연락을 취했다. 외교 경로로 이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여 어명으로 체포된 자들을 풀어 준 일이 있었다.
선교사를 직접 박해한 사건이 1899년 황해도 황주에서 발생했다. 선교 여행을 하던 장로교 리(Graham Lee)선교사가 황주에 도착했을 때 사교(邪敎) 박멸 명분을 내세워 박해를 가했다. 예배당을 때려 부수고, 교인들을 난타하며 이 목사의 책을 불태우고, 현금 56달러를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당시 주미 대리공사 알렌은 즉시 한국 정부에 항의 각서를 보내고 범법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몇 사람의 개인적 원한으로 전국적인 기독교 박해가 획책된 일도 있었다. 1899년 서울에 전차(電車) 공사가 한 참 진행됐다. 이 때 경무사(警務使) 김영준과 내장원경(內臟院卿) 이용익은 대중들이 전차를 타게 되면 재원(財源)이 고갈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전차 건설이 완료된 후에도 전차 타지 않기 운동을 뒤에서 부추겼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국왕에게 이 일에 대해 불평하자, 원한을 품고 국왕에게 개신교가 끼치는 피해를 낱낱이 상소했다. 이들은 1900년 12월 1일을 기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선교사와 전국 기독교인을 박멸하라는 밀서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 무서운 음모의 내막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은 선교 여행 중이던 언더우드였다.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지체 없이 한국인들이 읽을 수 없게 라틴어로 에비슨에게 전보를 보냈다. 에비슨은 이 사실을 알렌에게 알리고 교회와 교인 피해가 없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알렌은 즉시 국왕을 알현하고 사태를 보고했다. 고종 황제는 각 도에 전보를 발송하여 이의 즉각적인 중지를 엄히 명했다. 이로써 김영준 등의 음모는 불발에 그치고 교회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긴 일이 있었다.
한편 천구교도들에 의한 박해도 있었다. 천주교나 개신교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예수를 믿고,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교회다. 오늘날은 에큐메니컬 정신에 의해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두 교회간의 갈등이 자심했다. 물론 이런 갈등은 교단이 정책적으로 선도한 것은 아니고 대개 개인이나 개 교회 단위에서 이루어진 국지적 일이었다. 초기에 천주교인들이 개신교도들에게 악행을 하고 핍박을 한 사실이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최초 박해는 1891년 황해도 재령읍교회에서 일어났다. 예배 중 로마 천주교인들이 몰려와 남녀교인들을 협박 공갈하며 “대성교(大聖敎)를 불봉(不奉)하고 열교(裂敎)를 오신(誤信)함은 불가(不可)라 하야 태형(苔刑)하고 방송(放送)”한 사건이 일어났다. 역시 재령 원내동(垣內洞)교회 교인들이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을 때, 1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들이닥쳐, 예배당 공동 사용을 요구하며 교인들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1902년 황해도 신환포(新煥浦)에서 천주교인들이 그들의 성당을 지으면서 개신교도들에게 건축비 기부를 강요했다. 이에 응하지 않자, 이들을 끌고 가 감금하고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황해도 관찰사는 포졸들을 보내 범인을 체포하려했으나 천주교도들은 오히려 포졸들까지 구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서울에 곧 보고됐고, 자연히 외국인 사회에도 알려졌다.
천주교인들이 이렇게 방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뒤에 안악(安岳) 근처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빌헬름(J.Wilhelm)이란 성격이 괴팍한 신부 때문이었다. 당시 외국인들은 치외법권(治外法權)의 특전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특히 신부들은 프랑스 공사관의 절대적 보호를 받고 있어 그의 횡포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초기 개신교회는 천주교회로부터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으며, 일부 몰지각한 신부들의 방자함이 자심했음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는 어느 시대, 어디 곳에서나 고난의 가시 밭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역경을 거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