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감비아 단기선교 도중, 물에 빠진 여학생들을 구하다가 안타깝게 순직한 김수석 선교사(23·대전신대 3학년).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그의 희생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또한 그의 뜨거운 선교 열정과 담대한 믿음이 담긴 유서가 공개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주기도 했다.
강경중앙장로교회(담임 이승남 목사, 이하 강경중앙교회)와 대전신학대학교(총장 김명찬 목사) 공동주관으로 김수석 선교사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린 지 이틀 만인 7월 27일, 본지는 고인의 아버지인 김경후 안수집사와 영적 아버지인 이승남 목사를 강경중앙교회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예상과 달리 김 집사의 목소리는 매우 담담했다. 그는 "수석이의 죽음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면서도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서 선교에 대한 열정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길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김수석 선교사는 1993년 2월 23일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서 아버지 김경후 집사와 어머니 김미정 집사 슬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 선교사는 5대째 이어온 믿음의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고, 강경중앙교회 이승남 목사의 지도로 신앙심을 키워왔다. 그는 황산초·강경중·강경고를 거쳐 지난 2011년 대전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시작했다.
김수석 선교사는 지난 5월 5일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감비아로 떠났다. 일반적으로 단기선교는 여러 명과 팀을 이뤄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혼자 떠나서 현지의 선교팀에 합류했다. 그는 2013년 초 군에 입대하기 전, 컴미션에서 진행하는 요나선교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한 목회자를 만났고, 같은 충남 출신인 그와 자주 만나 신앙 상담과 대화를 하면서 아프리카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목회자는 컴미션의 박래수 선교사와도 각별한 관계다. 다음은 김경후 집사 및 이승남 목사와의 일문일답.
-김수석 선교사의 순직 소식을 듣고 어떤 심정이셨나.
이승남 목사(이하 이): 수석이는 어릴 때부터 무엇을 하든지 애착심을 보인 아이였다. 그 아이가 걸어다닐 때부터 교회 안에서 봐 왔는데, 차가 지나갈 때마다 하나하나 물어보고 '무슨 차다'라고 말하곤 했었다. 또한 유초등부 시절부터 대전신학교 진학까지 다 나와 의논하고 대화하면서 결정했다. 단기선교를 다녀온 뒤 강경중앙교회의 전도사로 임명받을 예정이었다.
수석이의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다음 날이 주일이었는데 마음이 굉장히 괴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침통하게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 새벽기도를 인도하는데 '이 일을 묻어 둘 것이 아니라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단지에 먼저 이 소식을 알렸다. 수석이의 장례를 치른 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특히 장례를 치르는 과정 가운데 지역교회와 학교, 주민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교회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됐다.
평택의 한 목사님이 "뉴스를 보고 매우 감동을 받았다"며 직접 연락해 위로금까지 보내 주셨다. 주일예배 때 유족들께 이를 전해 드렸다. 그 이후에도 그 목사님은 "나중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연락을 주셨다. 많은 위로가 됐고, 한국교회가 이번 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례식을 마치고 화장을 한 후, 영정사진을 들고 유골을 안은 채 교회에 들렀다. 교회에 잠깐 들러서 수석이가 좋아했던 찬송가 한 장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강대상에 감사 헌금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에는 "이렇게 멋진 친구 김수석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보니 눈물이 또 다시 왈칵 쏟아졌다. 그 아이가 친구들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김수석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를 떠나게 된 과정은.
김경후 집사(이하 김) 수석이가 "평생 목회를 할 계획인데, 젊을 때의 고생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아프리카 선교는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고 했다. 군에서 21개월 동안 군종 생활을 했는데, 이등병부터 병장 때까지 월급을 다 저축하고, 군대 가기 전에 식당 서빙 등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선교비를 마련했다. 요즘 아이들은 보통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데, 수석이는 자기가 다 준비했다고 하더라. 스스로 선교지로 나아갔다는 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이: 수석이가 선교 가기 전 내게 인사하러 왔다. 감비아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많이 들어 보지 못했던 곳인데, 수석이가 혼자 간다고 해서 "너 참 용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군 월급을 아껴서 선교비를 마련했다길래, "다른 사람들처럼 군대에서 과자, 음료수 사 먹고 싶었을 텐데 어떻게 그 비용을 아꼈느냐"고 물었다. "선교 비전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 요즘 세상에 그런 청년이 어디 있나.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김: 수석이가 그곳의 국제학교 학생들과 바닷가에서 주말 레크레이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는데, 여학생들 중 아이사투(20)와 리디아(17)가 해변 안쪽으로 들어가다 파도에 휩쓸렸다. 수석이는 이들과 가까이 있기도 했고 의협심도 있으니까, 이들을 살리려고 뛰어든 거다. 먼저 17살 여학생을 살려 놓고 다른 여학생을 구하려고 들어갔는데, 그 아이가 살려고 수석이를 꽉 붙들었다고 한다. 이미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움직이질 못한 거다. 그런 가운데 파도가 쳐서 휩쓸려 버렸다. 구명조끼는 없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5분 이상 지체됐다.
나중에 수석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인공호흡을 하며 살리려 했는데, 결국 수석이는 죽고 말았다. 이 과정을 지켜 본 현지 경찰들이 "의로운 죽음이니 시신을 해부하지 말고, 고인을 그대로 보존하자"고 해서 부검을 하지 않았다. 마침 한 시간 내에 위치한 국립병원에 영국제 알루미늄 특수관이 있다고 해서, 이를 이용해 수석이를 옮겨 왔다.
현지의 책임자인 한병희 선교사는 "수석이가 그렇게 된 일은 너무 안타깝지만, 감비아 선교에 있어서 한국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영역이 더욱 넓어졌다"고 말했다. 장례식에 이틀간 머물고 갔던 이재환 선교사(컴미션 국제대표)는 "제가 15년 동안 감비아에서 사역하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벽을, 수석이가 2개월 동안 있으면서 이번 사건으로 인해 깨뜨렸다"고 했다.
감비아는 인구 150만 명에 국토의 면적이 12,000㎢로, 전체 인구의 98%가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다. 감비아 대통령의 부인은 현지 국제학교 출신인데, 이번 사건이 발생한 이후 여러 가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일로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고, 선교가 더 쉬워졌다고 한다. 또한 죽은 여학생도 국제학교에서 가장 예수를 잘 믿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
-김수석 선교사의 유서도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줬다.
김: 수석이가 써 놓은 유서에서 인용한 말씀이 사도행전 20장 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다. 바울 사도가 죽음을 예감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면 죽으리라"는 순교의 각오를 하고 간 것이다. 이 길은 각오가 없으면 못 간다. 아들이 죽을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비장한 각오를 하고 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렇게 물에 뛰어들지. 안 믿는 지인들이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이 최고 어렵다"고 말해 줬다. 물에 빠진 이를 구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구하다 죽는 경우도 많다. 물에 빠진 이를 위해 뛰어든 것은, 희생정신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사실 이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사님이신 우리 어머니가 어제 전화를 주셨다. 어머니는 "수석이는 하늘나라에 가서 만나자. 네가 사는 동안 신앙생활을 잘해야 먼저 간 사람이 아쉬워하지 않는다. 수석이는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되니까 신앙을 바르게 해라. 먼저 가고 늦게 가고 차이가 있지만, 결국 만나게 된다"고 하셨다.
사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데, 아들이 먼저 죽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나. 그러나 신앙이 중요하다. 먼저 하나님 앞에 간 것은 간 것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좌절해 버리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겠나.
이: 내가 33세 때 강경중앙교회에 부임해서 올해가 62세인데,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지난 1992년 새로 건축한 교회 안에서 화재가 난 일이었다. 이번에 수석이를 먼저 보내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화재가 났을 때보다 더욱 가슴이 아프고 아쉬움이 남는다.
화재를 계기로 교회의 사명을 자각하고 선교를 시작했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선교에 대해 가르치고 선교헌금을 내도록 했다.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선교지에 헌금을 보내고 있다. 교인들 안에 선교에 대한 열의가 식고 동참이 적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경각심을 불어 넣으시지 않겠는가. 지난 주일에도 이러한 내용으로 설교를 하면서 '교회는 선교를 등한시하면 교회로서 가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선교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 넣고, 교인들이 열심히 선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