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웃으면서 사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요, 웃지 못하고 탄식하며 사는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웃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불행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가난해서 또 억울해서 많은 상처를 입고 성장해 왔을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하나님을 모신 아버지의 자녀처럼 웃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웃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귀가 주는 웃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비웃고, 멸시하는 웃음입니다. 거짓된 웃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속에는 살인적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웃는 웃음입니다. 독재자의 웃음이 있습니다. 속에 무서운 악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웃는 스탈린, 히틀러가 웃는 웃음입니다. 이것은 소름 끼치는 웃음이지요. 인간이 주는 웃음이 있습니다. 코미디언들이 억지로 웃기는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웃음이 있습니다. 성도가 은혜로 웃는 웃음인데 우리는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웃음은 영혼의 해방이요, 우리 마음을 결박하고 있는 죄에서 구원받은 자의 기쁨의 표현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로 9가지를 얘기했는데 <희락>을 두 번째에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은 성령의 열매요, 천국의 상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웃음'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됩니다. 창세기 17: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고 했습니다. 엎드려 웃었다는 것은 기쁨의 은혜로 웃음을 웃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엎드려서 웃음으로 경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울면서 예배할 수도 있고,웃으면서 예배할 수도 있고 예배 때 감정의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 이것이 최고의 예배의 모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웃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눈물도 있고,분노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웃으신다는 말씀이 시편에 계속 기록되고 있습니다. 구역 성경을 보면 시 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시 37:13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시 59:8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웃음에는 깊은 비밀이 있는데 장차 아들을 보낼 약속을 하시면서 웃으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우셨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웃음을 찾아야 합니다. 울기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었고 웃기 위해서 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라도 '하나님이 나를 웃기시네' 그럽니다. 남편도 하나님이 웃기시고 아내도 하나님이 웃기십니다. 그런데 그 웃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사라 때문에 웃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 때문에 웃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이삭을 보면서 동네 사람들이
"저거 웃기네." 그랬을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다 웃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예수를 믿나?'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까?' 그럽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빼앗겨버린 인간의 모든 불행을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주시는 웃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쁨을 인간 내면세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면 즐거움은 외면 세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웃고 살아야 할 많은 사람들이 울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비극이며 이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불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마귀에게서 해방을 얻기 위해서 웃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웃으면 마귀는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갈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웃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웃되 하나님과 함께 웃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는데 그 기쁨이 하나님을 대면한 믿음에서 얻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웃는 믿음을 얻는 것입니다.
효자는 부모님을 웃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옛날 가난한 부부가 "어떻게 하면 한 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의론 하다가 옷 저고리를 돌려 입고 부부가 어머니 앞에서 어설픈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랍니다. 아마 "너희들 웃기는 구나!" 그런 뜻이겠지요. 부모의 가슴에서 눈물을 뺀다든지, 탄식하게 만드는 것은 불효자입니다.
한국민족의 새로운 민족 개조론을 부르짖었던 도산 안 창호 선생이 말년에 평양에서 오 십 리 떨어진 태보 산에 조그마한 산장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는 산장 입구에 문을 세우고 "빙그레, 벙그레, 방그레"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린 아이는 방그레, 청년들은 빙그레, 노인들은 벙그레 웃어서 웃는 민족으로 웃는 얼굴로 새 민족을 이루자고 호소했습니다.
웃는 집에 만복이 깃든다고 한 것처럼 웃으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웃으면 장수합니다. 동의보감에 "웃음은 보약보다 좋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발행된 프랑스 보건지 "쌍떼"라는 잡지에 따르면 프랑스 의사들이 뽑는 가장 좋은 약은 '웃음'이라고 했습니다.웃으면 엔돌핀이 생기고 따라서 우리 몸에 침입해 들어오려는 모든 암의 병균들을 물리쳐 준다는 것입니다. 웃음은 건강의 특효약이고 최근에는 웃음 요법으로 병을 고치는 내적 치유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웃음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고, 벌 수도 없고, 꿀 수도 없고, 훔쳐 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공과 행복을 위한 비밀의 보화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이 웃을 수 있으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
네가 웃을 때 온 세상이 너와 같이 웃는다.
한 번도 웃지 않은 날은 완전히 잃어버린 날이다.
웃으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고, 울면 너 혼자 운다.
죽음을 앞에 놓고 "최후로 웃는 자가 승리한 자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마지막 내가 인생을 마칠 때 웃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승리자인데 그가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 하늘나라 소망 중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