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길을 가다가 보면 부자로 사는 사람이 담을 높이 쌓고 사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담은 그 집에 거센 바람을 막고, 도둑을 막고, 다름 사람이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에스겔 8: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담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런 가정집 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담을 헐어야 합니다.
먼저 다른 사람과의 쌓여진 담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 즉 말하자면 "나와 너" 사이에 담이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사이 화해라는 소리가 많이 들리고 미국 장로교 총회 프로그램 중에는 peace-making 이라고 <화평을 도모하는 것>의 구호가 있는데 이것도 인간 대 인간; 나라와 나라 사이의 담을 무너트리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나와 저 사람과의 거리가 너무 먼 것입니다.
담을 헐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는 살인행위가 지속될 것입니다. 아무리 육신은 가까이 있지만 마음의 벽을 쌓아 놓았으니 사람들 간에는 항상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통하지 않는 담으로 항상 싸늘한 냉전 태세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우들끼리도 서로 헐뜯고 다투어서 교도소의 장벽보다 더 보이지 않는 거창한 담을 쌓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도와 성도 간에 막힌 담을 찾아서 헐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큰 과제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은 하란 외삼촌 집에서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형님을 만나라 오면서 내내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의 형 에서와 20년 동안 큰 담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 세워 기도한 이튿날 형 에서가 4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처음에 마음이 섬뜩했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일 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 화해한다는 뜻에서 그를 맞으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울었습니다. 형 에서가 "내가 올 때 만난 가축 떼들은 웬 것이냐?"라고 묻자 야곱은 형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에서는 극구 사양했으나 야곱이 너무 간청하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숙곳으로 향해 갔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서 평생 동안 쌓였던 벽을 20년 만에 헐고 화해한 형제의 상봉이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담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시기하고 미워하고 좋지 않은 생각을 품는 것 때문에 벽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려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 너는 도중에 그와 재빨리 화해하라." 간격 진 담을 빨리 헐라는 말씀입니다.
레오날드 다빈치는 평소 몹시 미워하는 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위대하고 영원히 남길만한 그림을 그릴 때에 그 원수의 얼굴을 그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이란 작품에서 배신자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원수의 얼굴로 그렸습니다.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 데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마음속에 증오심의 벽이 가로 막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증오심이 자기 예술을 망쳐놓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원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내가 오늘 당신에게 막힌 담을 헐라 왔소. 용서 하오" 하고 화해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예수님의 얼굴이 착상되어 그릴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가 막혀 있으면 신앙생활을 바로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와 나라사이에 침략적인 전쟁의 담이 무너지는 날 세계 평화의 때는 올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원망과 시기와 이욕의 담이 무너지는 날 화해는 올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눈을 막아주는 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 질투, 탐욕 그리고 이기주의의 담이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됩니다.
내가 목회하던 교인 중에 삼형제가 있는데 그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 집안에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그 어머니가 아무 유언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 형제들 사이에는 너무 큰 담이 형성되더니 결국에는 무서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차라리 저렇게 재물이 많지 않았더라면 재물로 인한 형제간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고 죄악 된 요소가 담 너머 편에 서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허영의 담, 정욕의 담, 위선의 담,이런 담들을 헐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죄를 범한 이후에 큰 담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헐려고 해도 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담을 헐어버리는 공사를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치시면서 갖은 고난과 고초를 당하시다가 마침내 그가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 표시가 지성소와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양쪽이 잘 보이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했습니다.
우리는 악한 것을 은폐시키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눈을 막으려는 담을 당연히 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담을 헌다는 것은 간단치는 않습니다. 진정 눈물의 가슴 치는 통회가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담을 헐기는커녕 조금 남은 양심마저; 그 조금 남은 신령한 눈마저; 그 적은 부분의 영적인 힘마저, 막아버리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들 자신 속에 하나님 앞에 있는 죄악 된 담을 무너뜨리는 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바로 설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이 담을 헐라"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사이에 있는 담을 헐라하시고, 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아니한 담들을 헐라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담들을 헐어 화해를 도모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성결 된 생활을 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