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저녁 제자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함께 거실에 있다가 '난 좀 일찍 자야겠다'며 침대로 갔다. 토요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빠른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기다리면서 카톡을 보고, 인터넷을 열었다. 그런데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가 떴다. 서울시교육감으로 출마한 어느 후보의 딸이 올린 페북 글이다. 장문의 글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자녀를 돌보지 않은 고 후보는 서울시교육감 자격이 없다."
난 깜짝 놀랐다. 어떻게 딸이 지지 글이 아닌 이런 글을 올릴 수 있나? 나는 의구심을 갖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딸은 서울시민에게 간곡하게 호소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관심이 없었다. 전화나 생일선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재정적인 부분부터 자녀교육까지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사실이지 우리 부부도 어느 후보를 찍을 건지 이미 정해 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순간, '여기엔 뭔가 있는 게 아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만약 뭔가가 있지 않다면 이건 심각한 일이다.
이제 선거 막바지에 이른 시점이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 후보는 우세를 보였다. 그런데 선거를 며칠 앞두고 딸이 올린 '서글픈 가족사'야말로 막판 최대 변수가 되었다.
예상대로 그 후보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기자회견을 열어 해명에 나섰다. 기자회견에서 말하는 요지는 간단하다.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 뿐이다. 그러나 저의 자녀를 이용해 저를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공작정치에는 맞서겠다."
이쯤 되고 보면 유권자들은 으레 짐작한다. "또다른 특정 후보도 할 말이 있을 게다." 맞다. 예상대로 당일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리고 아버지와 딸이 빚는 갈등을 패륜의 문제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후보 따님이 올린 글을 읽고 무척 가슴이 아팠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런 패륜의 문제에 봉착하게 됐는지 해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님이 아버지를 흠집내고, 아버지는 딸을 돌보지 않았다. 이것이 패륜의 모습 아닌가? 세월호 선장과 고 후보가 보여준 책임감 없는 모습은 오늘 우리가 서울 교육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분명한 방향을 보여준다."
이런 형국인데 기자들이나 유권자라고 할 말이 없겠는가? 더구나 인터넷 누리꾼들은 더할 게다. 그러니 사람들은 말한다. "저도 돌아가는 꼴을 보니 듣지 않아도 뒤에 뭔가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수원지법 판사 출신의 아버지는 당연히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키우려 했을 테지만, 포철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전임 회장의 경우 당시에 벌써 3백억원 넘는 자산가라고 하면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여기 고승덕 후보가 말하는 전처라는 사람이 자식들을 미국 시민으로 키우게 했고, 이혼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사실이라면, 전처 뿐 아니라 이번에 SNS상에서 친부를 비난하는 글을 올린 딸도 엄마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에게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도대체 국민적 추앙을 받는 분의 딸이 이런 정신을 가졌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런 불행한 가정사를 이용해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후보라면 오히려 그 후보가 교육감으로 자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이 사회에 만연한 진실공방의 현장을 엿보고 있는 셈이다. 딸의 이야기가 맞는가?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의 주장이 맞는 걸까? 정말 정치적 장난이 맞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위기를 대처하는 구차한 변명인가?
사실 나는 그렇게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정치를 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매력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게다가 정치 세계에서 돌아가는 판세가 늘 이런 유형이었으니까. 그러나 한 마디 하고 싶은 게 있다. 정치를 떠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점검해야 할 게 있다.
우리는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실체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불행하게도 정치는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손에서 가장 쉽게 휘둘림 당하는 영역이다. 마귀는 정치판에 진실과 정의가 통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참된 것을 허물고, 거짓으로 물들이려 한다. 어느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수작을 눈치채야 한다. 이번 경우라고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어느 후보자의 주장처럼, 이게 정치적 야합이라고 한다면 너무 서글픈 일이다. 아무리 쟁취하고 싶은 목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프고 서글픈 가족사를 정치적 야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너무하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질스러움 아닌가? 그래도 일말의 양심 정도는 지켜야지.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정치라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살아있는 정치가 그립다. 그래도 이 민족의 꿈지기인 다음 세대의 '교육'을 책임지려는 사람들 이야기니까 더욱 그렇다.
딸의 말이 사실이라면, 공인으로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공인이 되기 전에, 제발 '가정'부터 돌볼 줄 아는 사람됨을 갖추길 바란다. 기본이 안 된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기본을 안 하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두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또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를 거니까.
두 후보자에게 당부하고 싶다. 만약 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당락에 개의치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반응을 보여주길 바란다. 만약 이게 정치적 쇼라면, 유권자들을 우롱하는 저질스러운 정치 작태를 청산하길 바란다.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이 비난 게임으로 얼룩지게 하는 현장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고 있음을 왜 모를까? 인신공격으로 물든 비난 게임 각축장은 언제쯤이면 멈춰 주려는가?
이렇든 저렇든 하나 기억할 사실이 있다. 상처의 쓴 뿌리가 갖는 심각성이다. 살다 보면 상처를 주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고,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재주도 없다. 불행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한다. 우리가 받는 상처가 심각한 것도 있지만, 별 것 아닌 것도 있다. 그러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아문 것 같다가도 언젠가 불쑥 튀어나와 자신과 상대방을 괴롭히는 게 바로 상처다. 그렇기에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끝'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몸부림치더라도, 상처를 안 받을 재주가 없고, 상처를 안 주고 살 재주도 없다. 그러나 상처 때문에 더 아픈 상처를 만들어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편 생각해 보고, 스스로 반성해 본다. 이게 정치판에만 있는 일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허다한 이야기 아니던가? 교회 안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교단 정치에도 똑같은 일들이 그대로 복사되고 있지 않은가?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으로 느껴져 가슴 뜨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