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남쪽으로 3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가면, 중국 3대 도시 중 하나인 광저우에 도착한다. 광저우는 중국 대륙 남쪽에 있고, 홍콩과는 기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아열대 기후에 속해 있어 북쪽에 있는 중국 도시들과 또 다른, 동남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나는 2003년 주재원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광저우에 갔다. 그 도시와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그곳에서 11년을 살다 왔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었던 지난 2007년은 중국 기독교 선교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위한 기념예배 및 활동에 참가하면서,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이곳에서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발을 밟고 있는 이곳에 그런 역사가 있었다니. 이사야서에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49:12)"고 예표한 시님 땅을, 성경학자들은 중국의 남쪽 지방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왔다. 그래서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모임을 '시님 연합'이라 부른다. 내가 사는 광저우는 중국의 맨 남쪽 지방이 아닌가.
아, 이곳은 특별한 곳이구나. 그리고 이 땅에 온 우리도 그냥 온 것은 아니었구나. 구약 시대부터 지명된 시님 땅의 역사를 통해 그분의 마음을 알고 싶어졌다. 이어질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그러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때부터 홀로 이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모리슨 선교사의 성경 번역을 시작으로, 각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온 광저우는 중국 선교의 관문이었다. 그래서 광저우에는 선교사님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 병원 및 선교사 묘원 등 많은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폐허가 되었거나 문화재로 지정된 곳 혹은 이름만 바꾼 채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들도 많았다. 그래서, 동네 혹은 거리마다 선교사님과 중국인들이 엮어간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간 선교 역사 기행은, 우리의 작은 마음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그분의 위대한 꿈과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특별한 방법을 깨닫게 했다. 세계 지도 위에 있는 한 점에 불과했던 광저우는 비전의 땅이 되었다. 이 여정은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아름다운 땅 광저우에 우리를 보내, 그곳에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고 기록하게 하신 보고서이다. 그 시간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오늘날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은 로버트 모리슨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읽고 있는 한글 성경의 기원은 중국어 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성경을 완전하게 중국어로 번역한 사람이 바로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었다. 고증에 따르면 당나라 때 고대 기독교인들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 성경의 일부가 들어왔으나, 번역본은 이미 소실되었다. 명말 청초 예수회 사람들도 1세기 이상 중국에서 전도했으나, 완전하게 성경을 번역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국, 복음, 사도 등의 말은 모리슨이 처음 한자로 단어를 만들어 표현한 것이었다. 성경을 처음 번역하는 것은 한자 세계에 없는 성경적 용어를 창조하는 일이기도 했다.
1807년 9월 모리슨 선교사는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다. 중국에 온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였다. 그는 영국 런던회 소속으로 런던에서 미국 뉴욕으로 가 미국 상선을 타고 마카오를 거쳐 광저우에 도착했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성경 번역과 중영사전 편찬이었다. 유럽 개신교 교단들은 18세기 말 인도에 이어 중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모리슨 선교사는 당초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했지만, 1804년 중국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모리슨 선교사가 광저우로 오게 된 배경
현재 모리슨의 묘역은 마카오에 있고, 그곳에 모리슨교회도 있기 때문에 마치 성경 번역과 중국 선교의 중심지가 마카오였을 것이라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모리슨 선교사의 최종 선교 목적지는 광저우였다. 모리슨 선교사의 광저우 입국 이후, 200년 이상 아편전쟁과 내전, 문화혁명 등 중국 대륙은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동에 의해 문이 닫혔고, 광저우에서 그의 성경번역 이야기 또한 드러나지 못했다. 이에 '광저우 13행'을 중심으로, 중국어 성경번역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모리슨 선교사는 왜 넓은 중국 대륙을 놔둔 채 남쪽 광저우로 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외국인이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이 바로 광저우였기 때문이다. 이는 광저우의 지정학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광저우는 중국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광둥성 성도(省都)이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3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광저우는 북경, 상해에 이어 중국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상업과 무역의 도시이다.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세계적 상품 박람회가 개최되는 곳으로 사업가들에게 익숙하고, 식도락가들에게는 광둥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2010년 아시안게임이 열려 대중적으로 좀 더 친숙해졌지만, 여전히 도시의 역사와 문화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2010년 광저우시는 이 오래된 도시의 나이를 2,224세로 발표했다. 기원전 214년 진시황이 광저우가 있는 영남 지방을 정복한 해를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광저우는 중국 역사 속에서 줄곧 정치·문화적으로 주변부였다. 광둥성은 일련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북쪽과 단절됐다. 중국 문명은 황하에서 발생했다. 거의 대부분 단일 왕조는 북경을 비롯한 북쪽에 수도를 정했고, 북쪽에서 공격을 받을 때만 남경으로 이전했다.
광저우는 중앙 정부와 떨어져 있어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는 곳이었고, 바다를 접하고 있어 해상으로부터 많은 문화와 문명이 전달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광저우는 2천년 동안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와 도착지였다. 고대 로마, 중동, 인도, 아프리카 등으로부터 온 상인들은 줄곧 이 도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을 했다. 즉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천 년 동안 중국의 남대문으로서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특히 1757년부터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85년 동안 중국의 모든 무역을 광저우에 한정시켰던 일구통상(一口通商) 정책으로, 광저우는 국제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청나라는 중화사상에 젖어, 다른 국가들을 오랑캐로 간주하고 그들과의 경제적 대외 관계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중국은 자신이 필요한 문화·경제·종교적 욕구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즉 외교란 중국의 자비에 의존해, 열등 국민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중국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서구와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앙 정부와 멀리 떨어져 정치·군사적인 위협이 크지 않은 광저우에서만 교역을 허용한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후 광저우는 중국 대외 무역의 유일한 통로였다. 광저우 입장에서 보면, 해상으로부터 서구 문명과 문화가 가장 먼저 전달되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광저우 황포항을 통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은 중국 대륙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도 광저우로 들어오게 됐다.
중국의 일구통상은 광저우, 광저우의 일구통상은 '13행'
일구통상이었다 해서 광저우의 어느 곳에서나 외국 상인과 중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교역할 수는 없었다. 광저우에서도 일구통상 지역은 13행(十三行, Thirteen Factories)이라는 곳으로 제한됐다. 청나라 때 광저우는 주강을 앞에 두고, 지금의 월수구 일부 주변이 성곽으로 싸여 있는 성채였다.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있었는데, 13행은 서문 바깥에 세워진 중국 유일의 대외 무역 타운이었다.
청 황제는 13행에 한해 대외 무역을 하게 했다. 정부에서 임명한 13행 상인들을 행상(行商)이라 불렀는데, 이들에게 무역 독점권을 줬다. 13행은 13명의 전문 상인 혹은 13개의 상관(商馆)을 의미하지만, 지역 통칭으로 불렸다. 행(行)은 보통 업종이나 영업점을 의미한다. 행상들이 운영하던 상점을 동문행, 이화행처럼 끝에 행을 붙여 불렀다. 각 상점들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오늘날의 무역상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13행 지역에는 중국인 행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 미국, 스웨덴 등 외국인 상관도 같이 있었다. 외국인 상관 구역에는 각 나라 국기가 펄럭이는 서양식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 데 모여 있을 뿐 아니라, 문들을 강 쪽으로 내 화물을 옮기기 편하게 했다. 외국 상관 건물은 중국에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축물이었다. 1층에 대부분 주랑을 놓는 지중해식을 본뜬 건축 스타일과 내부 장식들은 중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건물은 대부분 3층이었고, 상관에는 무역거래 책임자와 사원, 의사, 통역, 하인 같은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외국 상관은 폐쇄적이었고, 중국인, 외국인 부녀자, 무기 등은 출입이 불가능했다. 외국 상인은 특정 날짜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벗어나 광저우 성내는 물론 일반 중국인이 사는 곳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철저히 통제된 13행 지역에서 외국 상인들은 청나라 정부가 임명한 소수의 13행 행상들과만 교역을 해야 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서구 상인과 중국 행상들은 무역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의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면 정부를 대신해서 이를 해결하는 외교 업무도 했다는 점이다. 아편전쟁 배상금을 부담한 것도 청나라 정부가 아니라 13행 행상들이 출연해서 해결할 정도였다. 대륙의 무역을 한 도시가, 그것도 지정된 한 구역에서 독점적으로 했다는 사실은 중국 근대사에서 13행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래서 13행을 제국의 상점이라고도 했다.
13행에서의 거래는 중국보다 서구의 필요가 더 크게 작용했다. 18세기 서구인들 입장에서 중국은 수지맞는 국가였다. 도자기, 차, 비단은 부유해진 서구인의 급증한 수요를 충족할 대박 상품이었다. 광저우의 영문명 캔톤(Canton)은 중국(China) 이상으로 서구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서양 상인들은 '금으로 산을 만들고 진주로 바다를 메운다'는 광저우를 향해 앞다퉈 들어왔다. 광저우 황포항에 한해 5천 척이 넘는 외국 상선이 정박했다고 한다.
13행은 배가 닿을 수 있는 주강변에 있었지만, 외국 상선은 그곳까지 바로 들어올 수 없었다. 광저우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황포항 부두가 있었다. 거기서 무역선을 정박한 후, 세관 신고를 하고 선원들은 근처에 머물러야 했다. 세관 심사를 마친 무역 책임자와 선장 등 몇 명만 작은 배에 옮겨 타고 13행이 있는 서쪽으로 들어갔다. 중국에서 물품을 가져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3행 내 상관 창고에서 작은 배에 물건을 싣고 나와, 황포항에서 기다리던 무역선에 옮겨 실은 다음 그들 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외국 상선과 상인들이 광저우에 입국하는 데 까다로운 절차를 두었던 이유는 방위 목적이 컸다. <계속>
/김현숙 집사
2003-2013년 광저우 거주
2011년 광동 선교 이야기 <시님의 빛> 출간
2011년부터 광저우 선교 유적지 홍보 및 안내
2013년 에세이문학 등단
(현)한국 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현)한중 우호교류협회 여성교육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