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여성 신문기자가 칼럼에서 말한다. "남성들이여, 앞치마를 두르라.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남성들이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한국 여성들의 한숨을 담은 한 여기자의 탄식이다.
아이를 기르고 가사를 돌보면서 직장을 다니는 건, 슈퍼우먼이 걸어야 할 길이다. 그런데 한국 문화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걷고 있는 길이다. '상식 밖'의 일이 '상식'이 된 셈이다. 퇴근해 샤워를 하고 신문을 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남편. 그를 쳐다보는 아내의 눈살이 곱지 않다. 아니 고울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나는 생각해 본다. 부부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마음만 회복할 수 있다면? 아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남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텐데. 한국인의 정서와 상관없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와 상관없이. 이기적인 남성 위주의 사회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그저 사랑스러운 그대를 위해서 존중하는 마음만 가진다면.
최근 미국 한인사회에서 맥도널드 불매 운동을 선언하고 나섰다. 도대체 왜? 서로의 이야기가 엇갈리고 있기는 하다. 한인사회에서는 '맥도날드가 자만심에 빠져 인종차별, 노인차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매장측 목소리는 다르다. 한인 노인 고객 6명이 미국 뉴욕의 한 맥도날드 가게에서 새벽 5시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고객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 매장측에서 여러 차례 비켜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러나 노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경찰에 신고해서 쫓아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서로에게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그리워지는 사태다. 새벽부터 그 자리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노인들이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겠지? 한때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왔던 그들이 왜 이 지경이 되어야 하나?
수익을 우선으로 하는 매장에서는 분명히 속상한 일이다. 많은 손님을 받아야 하는데. 매출을 올려야 하는데. 어찌 됐든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니. 서로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주는 여유가 있었다면. 서로의 아픔과 고충을 조금만 배려해 줄 수 있었다면. 서로의 목소리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 준다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바로 그런 건데.
나에게도 82세가 된 어머님이 계신다. 43살에 홀로 되셔서 7남매 자녀들을 키우셨다. 그러니 남 모르게 흘린 눈물이 어디겠는가? 자식들 몰래 탄식한 적이 얼마겠는가? 질문을 던져 본다. 연로한 부모들이 '딸'에게서 수발받는 걸 원할까, 며느리에게 수발받는 것을 원할까? 아마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 '당연히 딸이 편하지 않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연구 자료에 의하면 다르다. 며느리, 또는 딸에게 수발 받는 노인 293명의 우울 수준을 측정해 보았다. 그 결과 딸이 수발하는 노인의 우울감 평균점수는 9.31점, 며느리가 수발하는 노인은 7.49점이었다. 딸에게 보살핌을 받는 노인이 며느리 도움을 받는 노인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울해한다는 뜻이다.
서구 선진국의 연구와는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왜?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들 내외와 동거하고 며느리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며느리 대신 딸이 수발을 들 때,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다 바친 분들인데, 연로해서 누구에게서 부양을 받아야 할지 때문에 마음이 우울해진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프다.
너나 할 것 없이 늙은 부모를 내팽개치는 시대다. 왜 며느리의 고충을 모르겠는가? 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낀 아들의 심정을 모르겠는가? 그래도 우리를 위해 한평생을 한숨 지으며 사셨던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어차피 나도 그 길을 뒤따라 갈 건데.
존중이 사라지는 시대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탈 권위 시대이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학생들이 선생님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탄식이 나올 지경이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마음만 아플 뿐.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존경을 회복해야 할 것을 역설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딤전 5:17)'. 세상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할 마땅한 분위기이다. 왜 존경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목회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리가 없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故 박윤선 목사님은 말했다. "설교하는 목사는 무조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며, 목사의 설교는 무조건 존경받을 만한 것이다." 아마 여기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다. 충분히 반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배나 존경받을 길을 저버린 목회자가 많기 때문에.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목회자가 속출하기에 이 말을 하는 이로서도 가슴이 아픈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 교회는 시대 흐름을 좇아가서는 안 된다. 존중이 사라지는 시대에 존중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사단은 목회자의 신망을 실추시킴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비판은 나중이고, 존경이 먼저이다. 순서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는 존중하는 마음을 다시 주워 담았으면 한다. 우리의 마음의 그릇에다가. 차곡차곡. 가득히 넘쳐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