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기술하기 전, 먼저 천주교회의 역사 중 중요한 것만 몇 가지 거론했다. 이본 회부터 개신교의 역사로 들어가기로 한다.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 온 개신교인이 누구냐는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개신교인이 들어 왔다고 개신교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두말 할 것 없이 한국에 처음 들어 온 개신교도는 서양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처음으로 도래한 서양 사람이 누구냐를 살펴봐야 한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서양 사람의 한국 도래는 1582년(선조 15년), 제주도에 표착한 마리이(Ma Ri-I:馬里伊)였다.그러나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후 가톨릭 성직자로서 세스페데스(G. Cespedes)가 임진왜란 때 종군신부로 왔다는 사실은 전술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개신교 신자로서 우리나라에 처음 온 사람이 누군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627년(인조 5년)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J. J. Weltevree, 미국명 John Wetteree:朴燕 1595-?)가 일행 두 사람과 함께 대만을 거쳐 일본 장기(長崎)로 항해하다 배가 난파되어 전라도 해안에 표착(漂着)한 것이 처음인 것으로 되어 있다. 네덜란드는 근세에 이르러 세계의 해상권을 쥐고 교역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이 나라는 유럽 제국 전체의 상선 75%를 차지하는 약 3만 척을 갖고 세계 무역에 앞장서고 있었다.
따라서 항해가 잦은 네덜란드 인들은 낯선 해역에서 난파되는 경우가 흔했다. 네덜란드 군함 오더커레스(Auderkeres) 호가 조선 근해를 여행하다, 물을 얻기 위해 벨테브레와 두 사람을 상륙시켰는데 관리들은 이들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에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관원들에게 억류된 벨테브레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군대에 편입되어 병자호란에 참전하였다. 이 전쟁에서 두 사람은 전사했고, 살아남은 벨테브레는 그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 여자와 결혼이 허락되어 1남 1녀를 낳았다. 따라서 그는 한국에 귀화한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고, 최초의 서양 혼혈아를 낳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군대에 편입되어 대포 제작에 협력하였고 가끔 표도(漂到)해 오는 외국 사람들을 위한 통역관 일을 맡았다. 벨테브레가 개신교 신자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아직 찾을 수 없다. 다만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였고 그 국민들은 거의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신자였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또한 그에 관한 몇 가지 기록들은 그가 신자였음을 증명해 준다. 다만 그는 선교사가 아니었으므로 전도를 한 흔적은 볼 수 없다. 그는 이 땅에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벨테브레 다음으로 한국에 온 서양인은 1653년(효종 4년) 동아시아에 교역을 위해 약재(藥材), 녹피(鹿皮) 등을 실은 스파 베(Spar-wehr:Sparrow Hawk) 호를 타고 일본 장기(長崎)로 가다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Hendrik Hamel, 哈梅兒 ) 일행이었다. 그들은 제주도 앞바다에서 난파되어 28명은 익사하고 36명이 화순포(和順 浦)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자, 서울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서울에서는 통역관으로 벨테브레를 내려 보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하멜 일행은 통역관으로 온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나라 네덜란드인임을 알고 서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하였다.
이들은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호송 도중 몇 명은 목숨을 잃었고, 서울에 도착한 나머지 인원들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탈출을 꾀했다는 이유로 전라병영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다시 전라좌수영(여수)으로 호송되어 같은 일을 하였다. 하멜은 내심 바닷가에 온 것을 기뻐하면서 일본으로 탈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디어 1666년(현종 7년) 9월 하멜과 일행 여덟 명이 야음을 타 선박으로 탈주하여 일본 장기(長崎)에 도착하였으니, 실로 억류생활 13년 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그 곳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商館)의 주선으로 1668년 7월,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도착하였다. 하멜은 고국에 돌아간 후, 「표류기」(An Account of the Shipwreck of a Dutch Vessel on the Coast of the Isle of Quelpart)와 「한국에 대한 기술(記述)」 (The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Corea)을 저술하였다.
「표류기」는 하멜 일행이 항해 중 표류하게 된 경위와 한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탈주와 귀환에 대한 사실을 적은 것이고, 「한국에 대한 기술」은 한국의 지리, 기후, 토산물, 정치, 종교, 사회풍습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되자 당시 유럽에서는 동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던 때여서 인기 있는 책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읽혀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이 책은 불어, 영어, 독어로 번역되어 유럽 대륙에서 폭넓게 보급되었다. 따라서 하멜의 책들로 인해 한국이 유럽에 널리 소개되었고, 또한 이 책들은 한국을 소개하는 유일한 책들이 되었다.
하멜이 개신교도였다는 사실은 그의 「표류기」 끝 부분의 기록에서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다.
“살아 돌아온 우리 9명은 13년 28일에 걸친 긴 포로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였으며,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하였다.”
이 글에 나타난 하멜의 무사 탈출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남아 있는 동료들을 위한 기도는 그가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따라서 하멜은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도라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전도를 하거나, 자신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을 증거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멜은 한국 개신교사에 주목할 만한 큰 족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책을 통해 한국을 구라파에 소개한 일과,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도라는 사실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