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유 싸게 팝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새내기 주부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일. 인터넷으로 분유를 주문했다. 그런데 배달된 것은 밀가루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우리 교회는 주차장을 주민들에게 개방한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며칠 동안 차를 주차해 놓고 아예 전화도 받지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골 갔단다. 어떤 사람은 전화번호도 남겨놓지 않고 주차를 해놓기도 한다. 심지어 옆에 있는 차를 긁어놓고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얌체들, 파렴치한들..., 그래도 어찌하랴. 교회인 줄 알고 그러는 자들이니. 마음만 아플 따름이다.
요즘 어렵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쓰레기를 버리는 법이 있다. 아무렇게나 버리면 안 된다. 그런데 새벽이나 늦은 밤이 되면 양심 없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몇 푼의 돈을 아끼려 양심 없는 얌체 짓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 동네에 불쾌한 차가 있다. 동네 길거리 커브길 모퉁이에 차가 한 대 서 있다. 늘 그렇다. 커브길에 주차해 놓으니 다른 차들이 다니기 불편하다. 골목길에 주차를 하더라도 양심껏 했으면 좋겠다.
서초동 어느 고급 주택가.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집 담장을 넘어와 사다리를 내려놓았다. 물론 얼굴이 보일 만한 CCTV는 돌려놓았다. 뒷마당을 서성이다 불 꺼진 빈집에 들어갔다. 대도 조세형이다.
1970-1980년대 부유층과 유력인사의 집만 골라 절도를 벌였다. 그래서 대도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절도를 해도 그에게는 룰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털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1982년 붙잡혀 15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회심해서 목회활동을 해 왔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빈집을 털다 경찰 총을 맞고 검거되었다. 이제는 좀도둑이 되어 버렸다. 벌써 75살. 30년째 절도 행각을 벌여 전과 10범이라는 훈장을 달고 있다. 출동한 경찰에게 순순히 잡혔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하더니 조세형이 그렇다. 한번 길든 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는 법. 그에게 물었다.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그가 하는 대답이 너무 속상하다. "선교 사무실 임대비용 3천만원을 마련하려고 그랬다."
'조세형이 회심했다.' 과연 믿어야 하는가? 믿어야 한다면 너무 가슴 아픈 일 아닌가?
'선교 사무실 임대하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선교해야 하는가? 선교인가? 그렇지 않으면 본인 생활비를 후원받기 위함인가?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하고, 믿지 않아야 하는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구분이 안 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 1:15).
디모데의 부모는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딤후 1:3). 그러한 믿음의 부모 밑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디모데가 자라났다(딤후 1:5).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양심과 믿음은 남남이 아니다. 양심이 파괴되면 도덕적 부패가 따라온다. 도덕적인 부패는 결국 믿음의 파산을 가져온다. 양심을 저버린 사람은 결국 얼굴 들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믿음에서 떠난다. 양심을 저버리고서도 얼굴을 들고 떳떳하게 활보한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
인생에는 정도(正道)라는 게 있다. 요즘 경영자 가운데 '정도경영'을 표방하는 이들이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바른 길을 내던져서는 안 된다. 바른 길을 걸어가면서 성공해야 한다. 목회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그런데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양심은 초기 단계에서 잘 지켜야 한다.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양심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양심 자체가 마비된다. 그러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서지 않는다. 느끼지도 못한다.
때때로 잘못할 수도 있다. 때로는 원치 않게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고 돌이킬 줄 모르면 그 다음에는 불행의 늪이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있다. 다윗 왕과 사울 왕의 차이가 있다. 베드로나 다윗 왕은 실수하고, 죄를 짓고 난 후 깨달을 줄 알았고, 돌이킬 줄 알았다. 그래서 회복이 되었다. 회복하고 나면 더 크게 쓰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룟 유다나 사울 왕은 자신이 하는 짓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깨닫더라도 돌이키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비참한 최후를 선택했다.
1:29:100.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있다. 1920년대 허버트 하인리히는 미국 여행보험사의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산업재해 통계를 분석하다가 중요한 법칙 하나를 발견했다.
"하나의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이와 관련된 작은 사고가 29번 발생했고, 작은 사고 한 건이 일어나기 전에 아주 사소한 징후가 무려 300번이나 있었다."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비슷한 작은 사고들이 여러 번 발생했다는 것이다. 작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빨리 조처를 한다면,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소한 작은 일이라고 해서 예사롭게 넘겨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징후 속에서 대형 사고를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작은 일이라고 쉽게 봐서는 안 된다. 작은 일에도 양심을 지켜야 한다. 작은 일에 양심을 저버리기 시작하면 머지 않아 큰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에 치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