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한국에서 어느 노인이 치매에 걸린 부인을 2년여 동안 수발을 하다가 결국에는 목을 졸라서 숨지게 하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투신하려던 중에 아들의 저지로 살아난 사건이 있었다. 한국속담에 3년 병수발에 효자없다는 말이 있다. 차라리 모르는 남을 직업적으로 돌보는 경우라면 모를까. 병수발이란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다. 그 노인이 병수발이 지겨워서 홧김에 저지른 만행이었을까? 아니면호전될 기미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부인을 위해서 차라리 편하게 인생을 마치게 해주려 배려는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살인은 살인인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가 부인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른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법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둔다. 가끔씩 법의 관용이라는 명분으로 자비를 베푸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부부관계에서도 사실과 진실의 차이때문에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사실)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은 것(진실) 일수도 있겠고, 그와는 정반대일수도 있겠다.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진실이 궁금해지면 일단 사실을 규명하려고 나선다. 너가 그때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다. 사실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사람들의 변명은 한결같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지 모르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라는! 그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겠다. 결국 진실은 알 수는 없다. 진실은 종종 사실확인만으로 밝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항상 진실을 알고 싶어하고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으려고 한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눈이 선해보였던지 아니면 인상이 좋았다는 이유로 많은 점수를 주고 신뢰한다. 흔히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하는데 왜 그 사람을 믿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냥 믿었다. 차라리 믿고 싶어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가 믿을만해 보였다는 것은 아마도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도 믿지 않고 살수도 없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신뢰의 점수를 많이 주지 않는다. 그 사람을 모르면 영점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믿음이 쌓여갈수록 더 많은 점수를 준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일이 적다. 일점이라도 점수를 더 주게되면 기쁨이 생긴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반대다. 첫인상이 마음에 들면 백점부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수를 잃어버릴 일만 남아있다.
믿음은 사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문제다. 사실을 확인한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제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등을 돌리고 십자가 처형을 요구한 사람들도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과 진실이 전혀 별개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엄하게 훈육한 자식이 부모의 진심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겉으로(사실) 사랑하지 않는 듯이 보였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진실) 사랑이다. 그래서 진실은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흔히 수학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학적으로 증명하면 주관적인 판단의 오류를 배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고대에 수학은 종교였다. 소위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것을 보면 길이가 각각 1cm 인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는 √2 이다. √2는 무리수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irrational number라고 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숫자라는 뜻이다. 미친 숫자라는 뜻이다. 소수점 이하로 무한대로 나가기 때문에 끝이 없다. 그래서 이런 숫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 비밀을 폭로하려던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살해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무리수의 존재는 그들의 믿음의 체계가 흔드는 일이었다. 수학이나 과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름대로 각자의 믿음의 바탕위에 집을 짓고 있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사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헛되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나의 졸렬한 글솜씨때문에 진실이 왜곡될수 있다). 이 부분이 많이 뒤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 믿는자의 숫자가 반드시 늘어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칼럼리스트 하인혁 교수는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Western Carolina University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Lifeway Church에서 안수집사로 섬기는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91년도에 미국에 건너와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앞으로 하인혁 교수는 기독일보에 연재하는 <신앙과경제> 칼럼을 통해 성경을 바탕으로 신앙인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올바른 경제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고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해 나가야 하는지를 풀어보려고 한다. 그의 주요연구 분야는 지역경제발전과 공간계량경제학이다. 칼럼에 문의나 신앙과 관련된 경제에 대한 궁금증은 iha@wcu.edu로 문의할 수 있다"-편집자 주-
그가 부인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른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법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둔다. 가끔씩 법의 관용이라는 명분으로 자비를 베푸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부부관계에서도 사실과 진실의 차이때문에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사실)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은 것(진실) 일수도 있겠고, 그와는 정반대일수도 있겠다.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진실이 궁금해지면 일단 사실을 규명하려고 나선다. 너가 그때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다. 사실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사람들의 변명은 한결같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지 모르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라는! 그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겠다. 결국 진실은 알 수는 없다. 진실은 종종 사실확인만으로 밝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항상 진실을 알고 싶어하고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으려고 한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눈이 선해보였던지 아니면 인상이 좋았다는 이유로 많은 점수를 주고 신뢰한다. 흔히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하는데 왜 그 사람을 믿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냥 믿었다. 차라리 믿고 싶어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가 믿을만해 보였다는 것은 아마도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도 믿지 않고 살수도 없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신뢰의 점수를 많이 주지 않는다. 그 사람을 모르면 영점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믿음이 쌓여갈수록 더 많은 점수를 준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일이 적다. 일점이라도 점수를 더 주게되면 기쁨이 생긴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반대다. 첫인상이 마음에 들면 백점부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수를 잃어버릴 일만 남아있다.
믿음은 사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문제다. 사실을 확인한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제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등을 돌리고 십자가 처형을 요구한 사람들도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과 진실이 전혀 별개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엄하게 훈육한 자식이 부모의 진심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겉으로(사실) 사랑하지 않는 듯이 보였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진실) 사랑이다. 그래서 진실은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흔히 수학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학적으로 증명하면 주관적인 판단의 오류를 배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고대에 수학은 종교였다. 소위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것을 보면 길이가 각각 1cm 인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는 √2 이다. √2는 무리수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irrational number라고 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숫자라는 뜻이다. 미친 숫자라는 뜻이다. 소수점 이하로 무한대로 나가기 때문에 끝이 없다. 그래서 이런 숫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 비밀을 폭로하려던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살해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무리수의 존재는 그들의 믿음의 체계가 흔드는 일이었다. 수학이나 과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름대로 각자의 믿음의 바탕위에 집을 짓고 있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사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헛되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나의 졸렬한 글솜씨때문에 진실이 왜곡될수 있다). 이 부분이 많이 뒤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 믿는자의 숫자가 반드시 늘어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칼럼리스트 하인혁 교수는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Western Carolina University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Lifeway Church에서 안수집사로 섬기는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91년도에 미국에 건너와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앞으로 하인혁 교수는 기독일보에 연재하는 <신앙과경제> 칼럼을 통해 성경을 바탕으로 신앙인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올바른 경제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고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해 나가야 하는지를 풀어보려고 한다. 그의 주요연구 분야는 지역경제발전과 공간계량경제학이다. 칼럼에 문의나 신앙과 관련된 경제에 대한 궁금증은 iha@wcu.edu로 문의할 수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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