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공대 총기 참사소식을 듣고난 후, 이제 대학에 들어가는 자식을 둔 제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부모 마음이 그런가 봅니다. 조승희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부모는 어린 남매를 미국에 데려왔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힘들여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두 자녀를 미국의 명문인 프린스턴대, 버지니아 공대에 입학시켰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젠 자식 잘되기만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했던 아들이 32명의 생명을 빼앗고, 자신의 목숨도 끊어버린, 미국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요.

어떤 이유로도 이같은 엄청난 비극을 가져온 장본인에 대한 책임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비참하고 슬픈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어렸을 때 자녀를 미국에 데려와 대학에 보내는 이민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내 자신도 반성하고 회개할 것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도를 통해 알려진 조승희는 심한 “외톨이”(loner) 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왔고, 한때 부모가 한국에 가있는 동안 혼자서 지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우울증을 앓았었고, 그의 어머니는 교회 목사님에게 아들의 내성적인 성격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부탁을 했다고도 합니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서 부모인 제 마음이 섬듯해 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모습은 이민 가정의 자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며, 심지어 내 자식도 이런 갈등과 아픔을 겪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가 사는 사회에 속해있는 일원이기를 원하고,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자기 정체성과 소속감은 어른들 보다 훨씬 더 강한 욕구입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인으로 보고, 한국인들은 그를 미국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지금도 조승희가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를 가려보자는 보도도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민 자녀들은 쉽게 외톨이가 되고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생계와 공부로 바쁜 부모들은 외로워 하는 자녀들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습니다. 너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사치로 여기질 만큼 고생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순간 자녀들이 자라면, 이들은 한국말 대신에 영어만을 사용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한국식의 무뚝뚝하고 투박한 부모의 문화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고 그러면서 부모와 자녀들은 대화가 없어지고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들은 충분히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을 번져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누군가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자기를 이해해 주고,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대상이 나타다면, 그에게 푹빠져, 온 마음을 다 쏟고, 그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마저 그를 배신하게 된다면 그는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되 버리고 사고를 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목사로서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저는 반성하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부모가 부족하고 형편없어도 당당하고 멋지게 자라주는 우리의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의 그늘에서 절망과 패배감에 울고 있는 자녀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선택도 아니고, 부모와 함께 이민와서, 이 사회에 적응 못하여 힘들어하고, 적응하려 몸부림 치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정체성을 심어주어야 겠습니다. 적어도 갈 곳없어 방황할 때, 언제라도 맘놓고 달려올 수 있는 사랑의 품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 코너스톤 커뮤니티 교회 설훈 목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