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12일 아침,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그의 귀를 찔렀다. 분명 아파트 위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반 이브렌(39세)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칼을 움켜쥐고 윗집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그를 맞은 건 태평하게 포르노를 보고 있던 윗집 남자였고, 반 이브렌은 주거침입죄로 체포됐다. 신문들은 이렇게 썼다. '포르노 DVD에서 나는 소리를 윗집 여자가 살려달라는 비명으로 착각한 남자, 칼을 들고 아파트에 들어갔다가 결국 기소되다'"
최근 새로 나온 책 하나가 있습니다. 위 기사는 1991년 의료과실 추적 연속보도로 플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조지프 핼리넌이 쓴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에 나왔던 실제 사건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상기할 때 장미 빛 안경을 쓰고 본다(중략).... 그러나 통계적으로 비행기 사고의 70%, 자동차 사고의 90%, 직장 내 사고의 90%가 당사자의 실수 때문에 일어난다. 사지 말고 놓쳐버린 부동산, 덜컥 사버린 고가의 물건,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 배우자, 폭락한 주식, 건드리지 말아야 할 얼굴의 종기, 몇 푼 아끼려고 직접 자르다 망쳐버린 앞머리... 크고 작은 실수가 반복되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바라는 것만 보는 [편향성]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만 믿고, 아는 것만 믿는다'라는 것입니다. 한 조사에서 낯선 남자를 트럭 운전사로 소개한 뒤 예상 몸무게를 물었더니, 피험자 대부분이 실제보다 무겁게 대답했습니다. 반대로 같은 남자의 직업을 댄서로 소개받은 집단은 실제보다 가볍게 추측했습니다. 상대방의 조건이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끼쳐 편향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권자들은 후보의 얼굴만 보고 능력을 판단해 버리고, 그 선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 인상이 머리에 이미 각인됐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근거 없는 자기 과신도 실수를 싹 틔운다고 지적합니다. 몇 년 전 월스트리트 저널에는 이런 정정 보도문이 실렸는데, "지난 월요일 본보의 한 페이지 분량 기사에서 영국의 한 대회에 참여한 광대들이 '외발자전거(unicycle)를 탄다'고 말한 것이 '유니콘(unicorn/상상의동물)을 탄다'고 잘못 보도 됐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철자의 앞 부분에만 집중해 오타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초보자에겐 보이고 전문가는 모르는 실수도 종종 일어났습니다. 2008년 4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 가능성을 예측했을 땐 13세 학생이 계산오류를 지적했고, 스미 소니언 박물관에선 27년 동안 모르고 지나쳐 온 실수를 견학 온 5학년 학생이 발견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익숙한 것일수록 대충 훑어보기 때문에 빚어지는 실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실수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가 추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스스로를 전문가라 생각하는 서투른 함정에 빠지지 말 것, 둘째, 좀 더 겸손 할 것, 셋째, 자기방식에 대한 고집을 내려놓을 것, 넷째, 실수를 반성하고 피드백을 주고 받음으로써 실수에서 배울 것. 그런데 이 책의 원본인 ‘Why We Make Mistakes'의 저자 후기에 보면, 저자가 경험한 아름다운 덕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도 실수할 수 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너그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이만큼 살아온 이유는 내 주변에 그 동안의 나의 실수를 품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책장 처음부터 끝까지 유명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실수 담이 빼곡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실수 사례에서 인간의 치명적 결함을 짚어내는 저자다운 저자의 분석력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황당무계한 실수 담에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하고 안도감을 갖게도 합니다. 즉, 저자는 인생이 진정 행복한 이유는 실수를 안 해서가 아니라, 실수하는 인생임에도 서로 격려하고 웃어줄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서 임을 은연 중에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저는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한 가지를 ‘내려놓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한 가지를 ‘올려 드리고’, 영적인 거룩을 위한 한 가지를 ‘간구하기’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저 에겐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니 바로 ‘용납’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목사로서는 부끄러운 단어이지만, 하나 내려놓을 것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행동, 생각을 내 방식으로 이해하는 편견이었고, 하나 올려드릴 것은 더 많이 품는 거룩한 마음이었고, 하나 간구할 것도 바로 주님의 십자가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도달해야 할 '임계점' (tipping point)임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중반기를 넘어선 사순절, 이런 저런 모양으로 ‘거룩을 향한 마음’을 계속 세워 나가십시오. 비록 우리는 다 실수를 하는 인생이지만, 이번 사순절 기간이 그 실수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는 내실있는 거룩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