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자동차라 할지라도 발동이 걸려야 굴러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발동이 걸리는 것을 점화(spark)라고 한다. 즉 자동차가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이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원리에서는 같다고 본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고, 교회를 다닌 경력이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신앙이 신앙으로 역할을 하는 것은 심령에 어떤 작은 불꽃이 있을 때부터이다. 물론 아는 것을 실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피동적인 활동일 뿐이지 역동적이지 못하다. 그 신앙이 움직이고 삶에 변화를 주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에는 심령의 감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실례는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감리교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이다.
그가 올더스케잇 거리의 작은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는 뜻을 품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고 고향교회에서 섬기던 열정을 가지고 목회 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는 것을 이야기하였고, 아는 지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였다. 목회의 열정은 목사이기에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교인들에 대한 의무이고 책임 감당이었을 뿐이다. 내 안에 기쁨과 감격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을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설교 시간에 그분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나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근심케 하지 않으려 하였다. 놀라운 것은 심령이 지극히 평안하였으며, 내가 하는 목회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으며, 누구에게나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모습과 그렇지 못한 모습이 분명히 다른 것을 경험하였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은 무엇이며 어떻게 임하는 것인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바로 왕이 요셉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으리요”(창41: 38)
바로는 요셉이 자기의 꿈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사람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에게는 분명히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어떻게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을 먼저 생각하였다. 즉 요셉은 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감동된 자의 모습이다.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런 순간마다 영혼이 빛나게 되며 우리의 심령에 믿음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혼은 어둠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또 히브리서 9장 14절의 말씀을 보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 말로 더욱 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표준새번역)
영원하신 성령께서 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리게 하신 일이다. 이 보혈이 하는 일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과거의 행실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케 하는 점화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 양심이 깨끗해지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이고, 이것에서 출발하여 과거의 옛 습관도 끊어버리게 되고 하나님도 진실한 마음으로 섬겨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을 입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먼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죄인이며 사악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눈으로 범죄하여 눈을 찌른다고 하여 마음속에 있는 정욕까지 없앨 수 있는가? 손가락을 자른다고 하여 마음에 있는 탐심마저 없앨 수 있는가?
결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죄 값을 청산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고마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인 것이다. 그 결과로 이제는 죄를 싫어하게 되고 사랑의 존재로 살아가게 되며,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죄를 거절하는 모습이 바로 양심이 살아난 모습이고 양심이 깨끗케 된 증거인 것이다.
찬송가 434장의 3절의 가사를 보면, “그의 사랑 어찌 큰 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 나라 갈 때에”라고 하였다.
즉 성령 감화 받은 영혼이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찌나 큰 지 이루 말 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성령 감화 받은 영혼이고 하늘나라 갈 때에 영원토록 부를 찬송이 <예수 인도하셨네!> 인 것이다.
한 번의 인생을 살면서 하늘의 감동을 받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야말로 진정 하늘의 감동이다.
하늘의 감동으로 용서받았기에 용서하며 살고자 하고 사랑받았기에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지 않은가!
이선영 목사(콩코드 한인 연합 감리교회) 제공
신앙생활도 원리에서는 같다고 본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고, 교회를 다닌 경력이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신앙이 신앙으로 역할을 하는 것은 심령에 어떤 작은 불꽃이 있을 때부터이다. 물론 아는 것을 실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피동적인 활동일 뿐이지 역동적이지 못하다. 그 신앙이 움직이고 삶에 변화를 주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에는 심령의 감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실례는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감리교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이다.
그가 올더스케잇 거리의 작은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는 뜻을 품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고 고향교회에서 섬기던 열정을 가지고 목회 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는 것을 이야기하였고, 아는 지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였다. 목회의 열정은 목사이기에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교인들에 대한 의무이고 책임 감당이었을 뿐이다. 내 안에 기쁨과 감격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을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설교 시간에 그분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나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근심케 하지 않으려 하였다. 놀라운 것은 심령이 지극히 평안하였으며, 내가 하는 목회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으며, 누구에게나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모습과 그렇지 못한 모습이 분명히 다른 것을 경험하였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은 무엇이며 어떻게 임하는 것인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바로 왕이 요셉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으리요”(창41: 38)
바로는 요셉이 자기의 꿈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사람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에게는 분명히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어떻게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을 먼저 생각하였다. 즉 요셉은 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감동된 자의 모습이다.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런 순간마다 영혼이 빛나게 되며 우리의 심령에 믿음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혼은 어둠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또 히브리서 9장 14절의 말씀을 보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 말로 더욱 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표준새번역)
영원하신 성령께서 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리게 하신 일이다. 이 보혈이 하는 일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과거의 행실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케 하는 점화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 양심이 깨끗해지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이고, 이것에서 출발하여 과거의 옛 습관도 끊어버리게 되고 하나님도 진실한 마음으로 섬겨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을 입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먼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죄인이며 사악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눈으로 범죄하여 눈을 찌른다고 하여 마음속에 있는 정욕까지 없앨 수 있는가? 손가락을 자른다고 하여 마음에 있는 탐심마저 없앨 수 있는가?
결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죄 값을 청산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고마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인 것이다. 그 결과로 이제는 죄를 싫어하게 되고 사랑의 존재로 살아가게 되며,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죄를 거절하는 모습이 바로 양심이 살아난 모습이고 양심이 깨끗케 된 증거인 것이다.
찬송가 434장의 3절의 가사를 보면, “그의 사랑 어찌 큰 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 나라 갈 때에”라고 하였다.
즉 성령 감화 받은 영혼이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찌나 큰 지 이루 말 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성령 감화 받은 영혼이고 하늘나라 갈 때에 영원토록 부를 찬송이 <예수 인도하셨네!> 인 것이다.
한 번의 인생을 살면서 하늘의 감동을 받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야말로 진정 하늘의 감동이다.
하늘의 감동으로 용서받았기에 용서하며 살고자 하고 사랑받았기에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지 않은가!
이선영 목사(콩코드 한인 연합 감리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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