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하나님의 참된 일꾼은 바로 화평을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일꾼을 소개 하면서 등장하는 말이 무엇이지요? 네 문안하라 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개인적 인사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의 성도는 문안을 주고받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16절에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생명유지의 Key는 교제입니다. 교회에 생명력이 넘치려면 성도간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따뜻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으려면 주님과 날마다 긴밀한 교제를 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간의 교제는 교회의 활력소가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분열을 시킵니다. 이간질 합니다. 훼방합니다. 불화를 만들고, 분노케 하고 짜증을 유발시켜서 화평을 깨려고 합니다. 말로만 거창하게 보이는 사람, 신앙보다는 세상적인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조직을 맡기면 분쟁만 일어납니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교회를 허무는 역할을 합니다. 역할이 멈추어 버립니다. 왠지 아십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마귀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에도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롬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교회의 화평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훈을 거스르는데 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공연히 거역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를 혼란시키려는 조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의 목적은 바로 자기를 나태나고 싶어 하는 교만이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영화를 위해서 미혹시키는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는 화평을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번째 교회의 참된 일꾼은 바로 열매가 있는 헌신을 하는 사람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우리는 ‘에배네도’라는 사람을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첫 열매를 잊지 못하고 로마서의 마지막에 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열매가 있습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가 중요하듯이 첫 열매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떠나면 두 달이면 모두 흩어집니다. 기억지도 않습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정한 분위기 속에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저 우루루 모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도 실망하는 이유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있는 것같이 느껴져야 하는데 일은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쁜 중에도 자기의 첫 열매를 기억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굴 기억하고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맺을 열매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마리아’라는 분이 어떤 여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모두는 이 여자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여기 두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입니다. 두 사람 모두 옥에 갇혔던 것으로 보아 이 사람들은 부부라기보다는 둘 다 남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이 사도바울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나옵니다. 그들은 바울의 친척이라고 소개되었지만 바울의 친척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갔을 때 함께 갇혔고 바울이 매 맞을 때 함께 맞았습니다. 바울이 수모를 당할 때 이 사람이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열매를 맺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능력이 없는 것은 모두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아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집단에 불과합니다. 주일날 잠깐 와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수요일 날 잠깐 와서 예배에 참석해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자신의 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 있는 두 사람은 바울과 함께 같이 고난당했고 함께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기까지 성장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사도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들이었고 소문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으며 사도바울보다 믿음의 선배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뒤에서 기도해주고, 같이 수고해주고, 함께 감옥에도 가고 매도 같이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십시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암블리아’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노예에게 쓰던 라틴식 이름입니다. 16장에는 노예의 신분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암블리아라고 하는 사람이 노예출신의 크리스천이고 그가 교회의 식구가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람 중에 과부도 있고, 부부도 있고, 자매도 있고, 형제도 있고, 라틴사람도 있고, 헬라인도 있고, 로마사람도 있지만 이분들이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우르바노’도 노예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벨레’라는 사람은 유태인인데 이 사람은 아마 시련과 고난이 많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시련과 고난을 잘 극복함으로 그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지만 공동체 안에서도 그 인격과 믿음과 겸손함과 능력을 인정받는 영적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아리스도불로’는 헤롯가문의 사람이었다고 주경가들이 말합니다. 헤롯대왕은 아주 흉악한 사람이었지만 그 자손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헤로디온’은 헤롯의 가문과 관계되어 있는 사람이고 ‘나깃수’는 글라디오스 황제 때 해방받은 유명한 노예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사도바울의 주변에서 사도바울을 돕고 함께 일했던 아름다운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앞에 ‘드루’라는 말이 같은 것으로 보아 자매였던 것 같습니다. 자매가 함께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버시’라는 사람도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 버시는 노예이름이 아님으로 자유인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보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라는 사람은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이‘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십가가를 지니~~ 그 자손들이 축복의 반열에 있다는 것..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여기서 ‘블레곤’이라는 사람만 빼고 모두 노예의 이름입니다. 아마도 노예출신들이 모였던 그룹인 것 같습니다.그런데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람이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만 모였거나 부자나 배운 자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이것은 개인이나 부부,형제가 아니라 가정교회입니다. 이제 중요한 구절은 16절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생명 걸고 예수 믿는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1절에서부터 15절까지 그 구성원을 살펴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사도바울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가능했고 사도바울의 1, 2, 3차 전도여행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주일날만 되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거는 것이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었고 우리는 취미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취미로 여기고 혹시 교회에 가지 않으면 교통사고날 것 같아서 교회에 갑니다. 자기의 삶을 헌신하여 생명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면서 믿는 사람은 극히 적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오히려 우습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나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10년을 믿어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보여준 교회의 모습이 진짜 교회의 보습입니다. 그것은 참된 교회의 일꾼이 헌신을 통한 열매가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으로 절에서 16 진정한 교회란 무엇인가를 한단어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거룩한 입맞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장로든지, 목사든지, 평신도든지 누구이든지 간에 예수의 이름으로 거룩한 입맞춤을 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합니다.
입맞춤은 아무나 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거리낌 없는 사람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입맞춤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껴안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이 와서 껴안으려고 하면 싫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교회란 거룩한 입맞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너희들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와도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가슴을 터놓고 친하게 지낼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위로받고, 용서받고, 이해받고,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더럽고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을 껴안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입 맞춰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몇 사람이 모여도 좋습니다. 마음을 줄 수 있는 곳, 같이 기도할 수 있는 곳, 같이 격려할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과 입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과 입 맞추고,성령님과 입을 맞추십시오. 그냥 지식으로나 객관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아무와도 상관이 없이 거룩한 입맞춤을 할 수 있는 곳, 그것이 우리 교회가 이루어야 할 참된 교회일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일꾼을 소개 하면서 등장하는 말이 무엇이지요? 네 문안하라 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개인적 인사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의 성도는 문안을 주고받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16절에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생명유지의 Key는 교제입니다. 교회에 생명력이 넘치려면 성도간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따뜻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으려면 주님과 날마다 긴밀한 교제를 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간의 교제는 교회의 활력소가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분열을 시킵니다. 이간질 합니다. 훼방합니다. 불화를 만들고, 분노케 하고 짜증을 유발시켜서 화평을 깨려고 합니다. 말로만 거창하게 보이는 사람, 신앙보다는 세상적인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조직을 맡기면 분쟁만 일어납니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교회를 허무는 역할을 합니다. 역할이 멈추어 버립니다. 왠지 아십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마귀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에도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롬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교회의 화평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훈을 거스르는데 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공연히 거역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를 혼란시키려는 조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의 목적은 바로 자기를 나태나고 싶어 하는 교만이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영화를 위해서 미혹시키는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는 화평을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번째 교회의 참된 일꾼은 바로 열매가 있는 헌신을 하는 사람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우리는 ‘에배네도’라는 사람을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첫 열매를 잊지 못하고 로마서의 마지막에 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열매가 있습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가 중요하듯이 첫 열매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떠나면 두 달이면 모두 흩어집니다. 기억지도 않습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정한 분위기 속에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저 우루루 모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도 실망하는 이유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있는 것같이 느껴져야 하는데 일은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쁜 중에도 자기의 첫 열매를 기억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굴 기억하고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맺을 열매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마리아’라는 분이 어떤 여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모두는 이 여자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여기 두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입니다. 두 사람 모두 옥에 갇혔던 것으로 보아 이 사람들은 부부라기보다는 둘 다 남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이 사도바울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나옵니다. 그들은 바울의 친척이라고 소개되었지만 바울의 친척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갔을 때 함께 갇혔고 바울이 매 맞을 때 함께 맞았습니다. 바울이 수모를 당할 때 이 사람이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열매를 맺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능력이 없는 것은 모두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아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집단에 불과합니다. 주일날 잠깐 와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수요일 날 잠깐 와서 예배에 참석해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자신의 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 있는 두 사람은 바울과 함께 같이 고난당했고 함께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기까지 성장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사도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들이었고 소문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으며 사도바울보다 믿음의 선배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뒤에서 기도해주고, 같이 수고해주고, 함께 감옥에도 가고 매도 같이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십시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암블리아’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노예에게 쓰던 라틴식 이름입니다. 16장에는 노예의 신분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암블리아라고 하는 사람이 노예출신의 크리스천이고 그가 교회의 식구가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람 중에 과부도 있고, 부부도 있고, 자매도 있고, 형제도 있고, 라틴사람도 있고, 헬라인도 있고, 로마사람도 있지만 이분들이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우르바노’도 노예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벨레’라는 사람은 유태인인데 이 사람은 아마 시련과 고난이 많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시련과 고난을 잘 극복함으로 그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지만 공동체 안에서도 그 인격과 믿음과 겸손함과 능력을 인정받는 영적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아리스도불로’는 헤롯가문의 사람이었다고 주경가들이 말합니다. 헤롯대왕은 아주 흉악한 사람이었지만 그 자손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헤로디온’은 헤롯의 가문과 관계되어 있는 사람이고 ‘나깃수’는 글라디오스 황제 때 해방받은 유명한 노예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사도바울의 주변에서 사도바울을 돕고 함께 일했던 아름다운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앞에 ‘드루’라는 말이 같은 것으로 보아 자매였던 것 같습니다. 자매가 함께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버시’라는 사람도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 버시는 노예이름이 아님으로 자유인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보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라는 사람은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이‘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십가가를 지니~~ 그 자손들이 축복의 반열에 있다는 것..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여기서 ‘블레곤’이라는 사람만 빼고 모두 노예의 이름입니다. 아마도 노예출신들이 모였던 그룹인 것 같습니다.그런데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람이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만 모였거나 부자나 배운 자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이것은 개인이나 부부,형제가 아니라 가정교회입니다. 이제 중요한 구절은 16절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생명 걸고 예수 믿는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1절에서부터 15절까지 그 구성원을 살펴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사도바울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가능했고 사도바울의 1, 2, 3차 전도여행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주일날만 되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거는 것이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었고 우리는 취미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취미로 여기고 혹시 교회에 가지 않으면 교통사고날 것 같아서 교회에 갑니다. 자기의 삶을 헌신하여 생명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면서 믿는 사람은 극히 적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오히려 우습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나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10년을 믿어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보여준 교회의 모습이 진짜 교회의 보습입니다. 그것은 참된 교회의 일꾼이 헌신을 통한 열매가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으로 절에서 16 진정한 교회란 무엇인가를 한단어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거룩한 입맞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장로든지, 목사든지, 평신도든지 누구이든지 간에 예수의 이름으로 거룩한 입맞춤을 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합니다.
입맞춤은 아무나 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거리낌 없는 사람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입맞춤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껴안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이 와서 껴안으려고 하면 싫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교회란 거룩한 입맞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너희들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와도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가슴을 터놓고 친하게 지낼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위로받고, 용서받고, 이해받고,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더럽고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을 껴안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입 맞춰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몇 사람이 모여도 좋습니다. 마음을 줄 수 있는 곳, 같이 기도할 수 있는 곳, 같이 격려할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과 입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과 입 맞추고,성령님과 입을 맞추십시오. 그냥 지식으로나 객관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아무와도 상관이 없이 거룩한 입맞춤을 할 수 있는 곳, 그것이 우리 교회가 이루어야 할 참된 교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