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이 사는 시대는 인터넷 정보의 홍수를 이루는 ‘클릭’시대라고 한다. 과거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삶에 있어서 고민이 되고 궁금한 것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어떻게 풀어가느냐’(Know –How)가 관심사 이었다면 이제는 그 문제의 해결을 ‘어디서 해결’(Know –Where)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인생에 있어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 다양할지 모르지만 그곳이 어디냐에 따라 “삶의 가치와 만족도”에 의한 결과는 상이하게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삶의 차이를 나눠본다면 두 가지 차원에서 볼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땅(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위(하늘)를 바라보는 것이다. 땅과 하늘은 서로 다른 끝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끝의 차이가 아닌 ‘삶의 영원한 소망과 무익함’의 결과를 가져올만큼 큰 차이를 이루고 있다.
어느날 땅 파기를 좋아하는 멧돼지가 혼자서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땅을 파보니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멧돼지는 다른 동물들에게 말하기를 '이것 봐라. 내가 얼마나 지혜로운 존재냐. 너희는 아무도 이런 비밀을 모를 거야.'라고 자랑을 하면서 계속해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참 팠더니 또 도토리 한 개가 나온 것이다. 그것을 본 멧돼지가 다시 말하기를 '이것 봐. 이것 나 혼자만 발견한 거야.' 그리고는 더욱더 신이나서 땅을 파헤치는데 상수리나무가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그 주변의 땅을 다 파헤치고 말았다. 결국 흙이 없이 뿌리만 남은 상수리 나무가 힘없이 넘어지는 바람에 멧돼지는 미쳐 피하여 도망갈 사이도 없이 자신이 파헤친 상수리 나무에 깔려서 죽게된 것이다.
멧돼지가 땅을 파면서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여 열심을 다해 보았지만 그의 맹목적인 열심과 그가 위(하늘)를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땅을 팟기 때문에 그 노력이 자신을 죽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들이라고 생각한다. 황금만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사람들의 삶의 환경에 많은 영향력을 주지만 돈을 많이 가진 재벌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기간이 ‘재벌 30년’이다. 이말은 인간의 삶에 돈이 주는 삶의 기쁨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것도 건강할때 유익한 것이지 신체와 정신적인 건강이 무너지면 오히려 소유했던 것들이 무거운 짐이되어 버리고 종국에는 삶에 허무함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라는 좀더 나은 신분의 상승과 최고의 권력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향하여 질주하려고 하지만 권력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 말은 한자성어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권력도 10년을 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아무리 정직하게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해도 일단 권력을 잡으면 십년안에 누구나 그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을 행하기에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권세를 오랫동안 정직하게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부와 권력을 가지기 위해 세상 사람들은 과거나 현재나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신분의 높 낮이와 상관없이 모두가 “논쟁과 갈등”의 반복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 마가복음9:33-35절을 보면 좀더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때 예수님께서 너희들 도로상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봤을 때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을 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그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권력의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키는 분명 세상을 향하는 ‘돈과 명에 그리고 권력’인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일시적인 목적을 심어주고 삶의 동기 유발을 시켜주는 자극제이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느껴진다면 그때부터는 그것들이 사람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할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를 하찮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심판의 재앙’을 피해 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무리 죄악을 행한 민족과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이들을 향한 심판을 돌이키실 뿐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빈손 들고 순복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며 진노를 거두시는 분이시다.
삶의 소망의 키는 바로 늘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여 의롭다 인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영원한 삶의 소망의 키는 세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이시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삶의 갈등을 풀어헤치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해결의 방법은 오직 ‘비전과 이상’이 존재하는 위를 바라보는 것이며 위를 바라보는 자가 삶의 새 출발을 할 수 있고 새 희망과 새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인생의 문제를 ‘Know-How’에서 찾는 자가 아니라 ‘Know-Where’ 에서 찾는자이다.
그런 사람은 소망의 키를 가지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구원자시라 세상 죄 무거운 짐 질때 위로하시며 용기 주시네 주님은 나의 방패 나의 힘이시라 세상 유혹이 나를 넘어뜨릴때 세상 이길 힘 주시네 주님은 나의 길이요 생명이니 나의 삶 방황 할때에 그분의 삶을 나에게 보이시며 따라가라 하시네 오 새로운 피조물이여 모두 일어나서 주를 찬양하세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를 바라보며 영광 돌리세” 정보의 홍수와 근거 없는 소리들로 고통과 혼돈의 시대속에서 현명한 삶을 살기 바라며 행복한 소망을 이루는 삶을 이루려 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께 나아가야 한다.
그 해결책의 키는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그렇다면 가정의 행복과 삶에 기쁨의 키도 주님이 가지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을 두고 아직도 세상이 크게 보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여긴다면 세상을 향한 눈에서 위를 바라보는 하나님을 향한 눈을 가져야 할 것이며 주님에게 진정한 삶의 문제와 행복까지도 맡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차이를 나눠본다면 두 가지 차원에서 볼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땅(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위(하늘)를 바라보는 것이다. 땅과 하늘은 서로 다른 끝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끝의 차이가 아닌 ‘삶의 영원한 소망과 무익함’의 결과를 가져올만큼 큰 차이를 이루고 있다.
어느날 땅 파기를 좋아하는 멧돼지가 혼자서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땅을 파보니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멧돼지는 다른 동물들에게 말하기를 '이것 봐라. 내가 얼마나 지혜로운 존재냐. 너희는 아무도 이런 비밀을 모를 거야.'라고 자랑을 하면서 계속해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참 팠더니 또 도토리 한 개가 나온 것이다. 그것을 본 멧돼지가 다시 말하기를 '이것 봐. 이것 나 혼자만 발견한 거야.' 그리고는 더욱더 신이나서 땅을 파헤치는데 상수리나무가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그 주변의 땅을 다 파헤치고 말았다. 결국 흙이 없이 뿌리만 남은 상수리 나무가 힘없이 넘어지는 바람에 멧돼지는 미쳐 피하여 도망갈 사이도 없이 자신이 파헤친 상수리 나무에 깔려서 죽게된 것이다.
멧돼지가 땅을 파면서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여 열심을 다해 보았지만 그의 맹목적인 열심과 그가 위(하늘)를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땅을 팟기 때문에 그 노력이 자신을 죽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들이라고 생각한다. 황금만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사람들의 삶의 환경에 많은 영향력을 주지만 돈을 많이 가진 재벌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기간이 ‘재벌 30년’이다. 이말은 인간의 삶에 돈이 주는 삶의 기쁨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것도 건강할때 유익한 것이지 신체와 정신적인 건강이 무너지면 오히려 소유했던 것들이 무거운 짐이되어 버리고 종국에는 삶에 허무함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라는 좀더 나은 신분의 상승과 최고의 권력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향하여 질주하려고 하지만 권력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 말은 한자성어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권력도 10년을 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아무리 정직하게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해도 일단 권력을 잡으면 십년안에 누구나 그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을 행하기에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권세를 오랫동안 정직하게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부와 권력을 가지기 위해 세상 사람들은 과거나 현재나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신분의 높 낮이와 상관없이 모두가 “논쟁과 갈등”의 반복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 마가복음9:33-35절을 보면 좀더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때 예수님께서 너희들 도로상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봤을 때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을 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그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권력의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키는 분명 세상을 향하는 ‘돈과 명에 그리고 권력’인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일시적인 목적을 심어주고 삶의 동기 유발을 시켜주는 자극제이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느껴진다면 그때부터는 그것들이 사람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할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를 하찮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심판의 재앙’을 피해 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무리 죄악을 행한 민족과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이들을 향한 심판을 돌이키실 뿐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빈손 들고 순복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며 진노를 거두시는 분이시다.
삶의 소망의 키는 바로 늘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여 의롭다 인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영원한 삶의 소망의 키는 세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이시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삶의 갈등을 풀어헤치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해결의 방법은 오직 ‘비전과 이상’이 존재하는 위를 바라보는 것이며 위를 바라보는 자가 삶의 새 출발을 할 수 있고 새 희망과 새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인생의 문제를 ‘Know-How’에서 찾는 자가 아니라 ‘Know-Where’ 에서 찾는자이다.
그런 사람은 소망의 키를 가지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구원자시라 세상 죄 무거운 짐 질때 위로하시며 용기 주시네 주님은 나의 방패 나의 힘이시라 세상 유혹이 나를 넘어뜨릴때 세상 이길 힘 주시네 주님은 나의 길이요 생명이니 나의 삶 방황 할때에 그분의 삶을 나에게 보이시며 따라가라 하시네 오 새로운 피조물이여 모두 일어나서 주를 찬양하세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를 바라보며 영광 돌리세” 정보의 홍수와 근거 없는 소리들로 고통과 혼돈의 시대속에서 현명한 삶을 살기 바라며 행복한 소망을 이루는 삶을 이루려 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께 나아가야 한다.
그 해결책의 키는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그렇다면 가정의 행복과 삶에 기쁨의 키도 주님이 가지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을 두고 아직도 세상이 크게 보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여긴다면 세상을 향한 눈에서 위를 바라보는 하나님을 향한 눈을 가져야 할 것이며 주님에게 진정한 삶의 문제와 행복까지도 맡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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