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암호 해독법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7언 중 1언의 암호를 풀어보자.

그간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시는 차원에서만 생각하였다. 물론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놀라운 것들이 발견된다. 과연 이 말씀은 죄를 지은 불특정 다수의 모든 인류만을 지칭한 것일까?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살피게 될 것이다. 먼저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자.

가인과 베드로의 부인

이 첫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간구하시며,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낯익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말 중에 아담과 이브 다음 세대가 한 첫 마디였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세기 4:9). 이 말은 성경의 첫 인류 아담의 두 아들 중 큰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난 후에 가인이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 있는가 가인에게 묻자, 가인은 아벨을 질투심으로 고의로 죽이고도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시치미 떼며, 알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인간은 이제 죽을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하게 된 것이다. 가인은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에 이제 살인을 더한다. 이것은 창세기 이후 우주에 생긴 첫 살인이었다. 참으로 사악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살인에 이제는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참람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악한 가인에 대하여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그리고 남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신다. 고의로 한 것을 아시지만, 그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창세기에서 만나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의 반복이며 정확한 대칭성이다. 이러한 상황은 창세기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도 반복되며 대칭을 이룬다. 이 반복으로 인한 대칭성은 놀랍게도 예수님과 수제자 베드로에게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받기 전날 목요일 밤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진행상황을 먼 거리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럴 때 하인 여자가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라고 외친다. 그때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한다. 부인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말이 틀리면 저주 받으리라 맹세까지 한다(마태복음 26:67-75). 이 상황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가기 전날 밤에 있었던 사건이었고, 죽어갈 자신의 스승이고, 자신이 주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 것이다.

가인은 동생 아벨이 죽은 후에 알지 못한다고 했고,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기 전에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다. 공통점은 알면서 모른다고 한 것이고, 죽음의 전후라는 것이고, 그들이 부인하는 대상은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육적 혈육인 형제 관계였고, 신약에서는 영적 혈육인 스승과 제자 관계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첫 간구는 그러므로 죄인 가인의 첫 마디와 자기 제자의 마지막 말을 대칭점으로 삼는다. 구약의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 그리고 신약의 둘째 아담의 첫 영적 아들, 베드로의 알지 못한다는 변명……. 동생을 죽인 사람의 부인, 그리고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부인인 것이다. 예수님께 구약의 가인과 신약의 베드로의 부인은 모든 인류의 뻔뻔함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신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용서는 구약의 죄인의 대표인 가인과 신약의 죄인의 대표인 가인의 죄를 용서하고 계신 것이다. 물론 이 둘은 전 인류를 상징한다.

가인은 저주를 받아 땅이 효력을 발하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가인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고, 보는 자들이 그를 죽이려 할 수 있는 정황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였다. 베드로의 경우 이제 마음 속에 영원한 죄책감의 가시에 찔리고, 다른 사람 보기에 민망하고, 제사장들이 예수의 제자라는 차원에서 잡아 죽일 수 있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직접 찾아오셔 그를 회복시켜 주시고 수제자권을 확인시켜 주시고, 그런 그가 자신과 동일한 죄악을 짓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예수님의 용서를 선포하도록 하신다(요한복음 21:15-18). 이것이 한 발자국 더 나간 십자가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첫 말씀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사악한 죄악들마저 용서하시는 것이다. 어찌 하나님께서 가인과 베드로가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셨겠는가?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언 24:12).

잠언의 말씀은 가인과 베드로,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류의 위선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십자가 첫 번째 말씀에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아담의 둘째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외아들을 죽이는 사람들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는 고통 속에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는 죄를 용서해 주십사 간구하는 예수님을 만난다. 창세기의 그 용서와 십자가의 용서, 그 역사성, 대칭성을, 점진적으로 더 사악해진 인간성 등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하여 용서를 간구하는 예수님의 상황을 알아야 이 암호가 풀린다.

물론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죽이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성경은 그래서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린도전서 2:8)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무식을 이해하셨다. 그러나 또한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위선도 이해하시고, 그것 마저도 용서하시었다.

또한 살필 것은 시편의 말씀이다.

시편 109의 완성

예수님의 이러한 용서의 기도는 시편 109편 4절의 말씀의 성취였다. 이 시편은 다윗이 깊은 고난 속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 다윗은 고백한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시 109: 4-5). 다윗은 장인인 사울 왕을 사랑하였지만, 사울 왕은 그런 다윗을 더 미워하고 대적하여 죽이려 하였다. 다윗은 또한 아들 압살롬을 사랑하였지만 그는 반역하여 다윗을 쫓아내려 하였다. 다윗은 사랑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함으로 오는 고통의 크기를 알며, 그러나 그들을 끝까지 사랑한 왕이었다. 일찍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장인 사울에게 질투를 받고 쫒겨 다니며, 왕이된 훗날 아들에게 왕권을 위협받으며 도망 가야 했던 다윗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가장 깊이있게 드러내주는 예표이다.

우리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시편들을 매우 전략적으로 인용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시편을 우리에게 암호로 주시기 위한 것임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7언을 통하여 시편을 직접 인용하신다. 십자가에서의 첫번째 말씀에서 시편 109편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시지는 않지만, 행동으로 이 말씀을 완성시켜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시지만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는 상황에서 묵묵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시편의 상황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를 청하지 않는 이들을 용서하신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기 전에 예수님은 용서를 하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암호 해독법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실을 모세의 글과 시편의 글을 통하여 대입해 보았다. 또한 가인과 베드로의 대칭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모든 인간의 알면서도 모른다고 부인가는 가증한 죄까지 용서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다윗왕이 어떻게 예수님을 예표하였는지를 살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시편들을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7언이 이토록 매우 전략적이고 깊은 암호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풀릴 때 더 깊은 은혜가 선포되도록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