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요소 가운데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시애틀의 명물로 알려진 Starbucks 커피도 사실은 분위기 상품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가 부슬 내리는 커피숍에서 구수한 커피 향에 젖어서 한가로이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은 풍요롭기도 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으로 비춰져서 한 끼 식사 값을 능가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그 곳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차가지로 우리 교회 하면 어떠한 분위기의 교회로 비처 질까? 제가 꿈꿔온 교회는 바로 이러한 영적인 행복감이 흐르는 교회. 분위기가 좋은 교회 뭔가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누리는 최대의 행복이 무엇이라 생각 하십니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말한다면 바로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일 것입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면 우선 기쁨이 있습니다. 사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교회에 다니면 신앙의 성장이 빠릅니다. 매일 매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참된 일꾼으로 훈련을 받고 세상을 변화 시키면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제자들이 된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축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좋은 교회는 그냥 하늘에서 뚝딱 떨어진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어떻게 해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 로마서의 배경이 되는 로마 교회를 보면 이 교회의 성도들은 여러 가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종교적인 배경도 다르고, 문화적인, 인종적인 배경도 다 다른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사는 방식이라든지 인생관이라든지 이런 것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명확히 나타난 기준은 말씀대로 따르면 되는데 문제는 성경에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은 부분은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으며, 서로의 입장에 따라서 심각할 경우는 대립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서로 다른 입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서로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에 1-5장에 보면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마음을 같이 하여.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교회를 세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 움직인 것이 능력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됨은 말한 나위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하나 된다는 것은 Uniform을 입듯이 다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획일적인 것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이라도 해도 다 다른 것 이해하십니까? 교회가 각기 개성을 가지고 존재 하는 것 보십니까? 이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분들이 명확하게 우리 신앙생활에 가이드라인을 주고 있습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아주 상세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음욕을 품지도 말라~~아주 정확 합니다. 거짓 맹세 하지 말라~~ 그러나 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던지 아니면 언급을 안 함으로 인해서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은 바로 그러한 문제 즉 같은 크리스천이라도 서로 다르게 볼 수 있는 도덕적인 혹은 비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Unity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가에 대한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여기서 의심하는 바라는 것은 바로 서로 논쟁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부분까지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논쟁이 될 만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이 어떤 이슈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든지 아니면 금하거나 허용하는 명확한 원칙이 없는 문제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선택 조항이 없거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것이거나 아니면 문화적인 적용이 가능한 부분들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통해서 세 가지 부분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모든 교회, 로마나 고린도교회나, 골로새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 등 어디든지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하는 것과 언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그 날에 대한 것과 술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아예 마시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면 적절히 조절해서 마셔야 하는가? 하는 것으로 당시 로마제국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된 것입니다.

당시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술과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되 완전히 방탕과 폭력과 무질서를 유발할 정도로 마셨기 때문입니다. 음식도 특히 귀족층들 사이에서는 목욕 문화가 발달 되어서 하루 종일 사우나에서 먹고 마시고 배가 부르면 토하고 또 먹고 마시고~~탐욕과 사치와 방종의 극치를 드러내는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반 서민에게도 악 영향을 주어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매우 타락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에 큰 이슈입니다.

그러면 21세기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슈는 무엇입니까? 많은 (타부) 금기 사항이 크리스천마다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많은 것들입니다. 즉 카드놀이라든지, 영화를 보러 간다든지, 클럽에서 춤을 춘다든지, TV를 보는가, 전기를 사용하는가, 컴퓨터, 성형하는 것 많은 것들이 성경에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은 사항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크리스천들은 저마다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것을 타부로 가지고 있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항목들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항목들이 일치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뒤져봐도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부분 교회들이 분쟁으로 갈리지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 사소한 것들일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교리적인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논쟁이 될 부분들로 인해서 갈라진다고 조지 비나교회 성장 연구소는 밝힙니다.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이 본문의 Key Word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받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우리가 서로 서로를 받아들일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절에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되면 뭐가 있지요. 네 주님이 함께 계시지요. 그리곤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음악적 취향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통적인 찬송가 스타일 어떤 분은 좀 더 현대적인 음악을 어떤 분은 예배에 교독문이 있어야 된다고 하고, 어떤 분은 묵도가 있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분은 헌금 궤를 돌려야 한다고 하고 어떤 분은 성가대가 꼭 있어야 한다고 하고 그리고 가운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만족 시키려고 하다가 그만 탈진이 되어서 목회를 떠난 분도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받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 입니까? 환영한다, 영접한다, 왕따 시키지 않는다. 서로 다른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를 왕따 시키지 않는것, 그것이 바로 서로서로를 받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까요? 오늘 본문에 바울은 세 가지 방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성도들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의견을 성도들에게 부정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Label을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랑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보면 세상적인 이라는 단어를 붙입니다. 아니면 육신적인 이라는 라벨을 붙입니다. 아니면 싸움닭, 묵은 닭, 그러나 이러한 표현 뒤에는 바로 판단, 심판이라는 과정이 이미 선행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성숙한자나 연약한자 둘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소중한 사람입니다.

권위 있는 기독교 잡지사에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교회에서 제일 불편하고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1위는 40일 금식기도한 사람이고 2위는 철야기도 잘하는 사람이고, 3위는 신학 공부한 장로님“이라고 대답 했습니다. 금식하고 철야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 이 모두는 개인의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는 귀중한 길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됩니까?

이런 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은혜를 자기의 영적이 성장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정죄 하는데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40일 금식 했으면 얼마나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하늘의 영광을 보고 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내려오자마자 하는 말이 “ 우리 목사님은 은혜가 없어! 우리 장로님들은 더 기도해야 돼 하는 것입니다. 눈이 세모 골이 되어서 누구를 칠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악령을 받았는지입니다.

기도를 했으며 좀 더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좀 더 은혜로워져야 합니다. 이런 금식 할 바에는 밥 많이 먹고 형제와 화목 하는 게 더 낫습니다. 이런 철야 할 바에는 잠 실컷 자고 말씀대로 순종하는데 더 낫습니다. 비판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믿음이 강한 자들은 다른 말로 성숙하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특별히 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유롭게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언약한 자들은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고 극히 예민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것은 다분히 문화적인 것이고 관습적인 면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서로를 받아들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연약한 성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항상 상대방이 연약한 성도라고 생각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항상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연약한 성도라고 생각 하는 분계십니까? 얼마만큼 자신이 강한 성도라 확신 하십니까? 강, 약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리를 올바로 아는 것. 믿음에 대한 이해를 바로 하는 것, 그러므로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바로 은혜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한 크리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율법주의자란 율법에 없는 것을 만들어 율법으로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율법주의란 내가 믿는 하나님을 만들어서 성경의 어떤 적용도 없이 남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신앙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는 것을 다른 사람도 먹어야 하고, 내가 느끼는 거소 다른 사람이 느껴야 하고, 내가 믿는 스타일도 다른 사람이 따라와야 하는가? 이것이 율법주의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크리스천을 우리의 교제에서 제외 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