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안으로는 우애, 친밀함입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존경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우애는 친구 사이의 단순한 우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의 뜻은 혈연, 곧 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들입니다. 이와 같은 형제 의식이 분명할 때 우리는 비로소 형제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눅18장을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세리가 죄인이고 바리새인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전혀 형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리를 멸시하고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

모두는 한 형제라고 하는 형제 의식 곧 우애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이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마다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봅시다. 눈이 아무리 밝게 잘 본다 할지라도 눈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귀가 아무리 잘 듣는다고 할지라도 귀로 냄새를 맡을 수는 없습니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에 맡겨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입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 지체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지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큰 수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붐비던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기 시작했습니다. 썰렁해졌습니다. 깊이 고민하던 수도원 원장은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자기의 옛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더니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 수도원이 침체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원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스승님!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속세를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큰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이 살인죄를 저질렀습니까? 간음죄를 저질렀습니까? 도적질을 했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그 수도원에는 메시야가 변장한 모습으로 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분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무지의 죄 때문에 수도원은 침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 원장은 그 말을 듣고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놓고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 듯하다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차츰 차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 변장한 메시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사람이 변장한 메시야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구를 대하든지 그때부터 사랑과 존경의 모습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 수도원은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사랑과 존경이 없을 때 메마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를 대하는 심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때,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입니다. 믿음의 한 가족들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와 같은 형제의식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의 마음에 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를 더 높여 주고 존경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교회를 향해서는 열심을 내는 것, 어떻게 충성스럽게 맡은바 직분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경상도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워낙 시골교회라서 목사님이 안 계셨습니다. 어떤 나이 드신 집사님 한 분이 그 교회를 맡아서 수고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호롱불을 켜 들고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성경을 펴서 구약성경 시23:1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본시는 그렇게 읽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호롱불 밑이라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글씨도 가물가물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은 시23:1의 말씀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을 자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물론 잘못 읽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그렇게 읽고 나니까 너무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께서 내 목을 자르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자 그날 예배에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두요! 나두요! 여호와께서 내 목을 자른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만을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날의 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가 100년 이라는 단시간 내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열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불타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어느 가정에서 매주일 아침이 되면 남편이 아내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 중에 오늘은 당신이 대표로 교회 갔다오지 둘이다 갈 것 없지 않겠어? 그래서 늘 대표로 아내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느 주일저녁 남편이 꿈을 꾸었는데, 아내와 함께 죽어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천국문지기가 묻기를 당신들은 부부지요? 예, 그렇습니다. 잘 되었소 둘 중에 대표로 부인만 들어가세요. 남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는 가정 대표로 나오신 성도가 안계시지요? 예배에는 대표제도가 없습니다.

책에 보니까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디다. 경기도 양주에 수동 교회가 있는데, 1902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최군명 장로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120리길을 걸어 서울에 있는 정동 제일 교회에 출석했는데 교회에 갈 때 감자 큰 것 두개를 삶아가지고 토요일 밤 9시경에 떠나서 새벽에 감자 하나를 먹고 계속 걸어서 정동 교회에 와서 감자 하나를 조반으로 먹고 예배드리고 다시 120리길을 걸어서 집에 옵니다. 이 성도의 열심에 감동한 선교사가 땅을 사서 거기다 교회당을 세워 주었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안으로는 열심, 밖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주후 337년부터 352년까지 로마 교황으로 있었던 성 율리우스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아주 점잔하고 훌륭한 사람이 율리우스를 찾아왔습니다. 율리우스는 그 사람에게 나는 예수님을 열심히 사랑한다고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열심을 좀 보여 주시라고 했습니다. 가슴에서 열심 덩어리를 하나 꺼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열심 덩어리를 저울로 달아 보더니 100드라크마어치라고 했습니다. 율리우스는 내 열심이 100드라크마어치나 되다니 대단하구나하고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율리우스의 열심 덩어리를 뜨거운 물에 넣어 녹여 분해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야심이 25드라크마, 의심이 19드라크마, 명예욕이 30드라크마, 세상을 사랑하는 열심이 21드라크마,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5드라크마어치였습니다. 율리우스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돈 버는 일에는 그동안 열심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과연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는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겼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4:7-8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한 수고는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다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섬기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잊지 아니하시고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상급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