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이슬람이라는 이슈가 세상을 흔들어대고 있다. 9.11 이슬람 테러로 수천명이 죽은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 앞에 15층짜리 모스크 건축 허가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미국뿐 아니라 세상이 어수선하다. 이는 억울하게 살해당한 사람의 묘지 옆에 살인범의 동상을 세워주자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자유 평등을 외치는 순진한 사람들이 그들의 음모를 도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9.11 이슬람 테러 9주년 기념일을 맞아 어떤 이가 꾸란을 소각하는 행사를 하겠다는 것에 대한 찬반 여론이 분분했다. 결국 그는 꾸란을 태우지 않았고 앞으로도 태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슬람을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를 죽여야 한다고 곳곳에서 성난 무리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카슈미르 지역에서는 꾸란 소각자 타도를 외치던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로 13명의 시위대와 1명의 경찰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경향뉴스 2010.10.14)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는 꾸란 소각 운동의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이스라엘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연합뉴스 2010.9.11), 뒤늦게 이란에서는 2~3만명의 시위대들이 엥겔럽 광장에 모여 항의했다.(미국의 소리 이란 방송 2010.9.17) 비이슬람권에서도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이슬람을 자극했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그들에게는 법도 질서의식도 없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 무질서한 무리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주신 율법 중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레24:20)’라는 법이다. 즉 누가 이를 하나 부러뜨렸으면 증인들을 통해서 사실로 입증되었을 때 법관 앞에서 가해자의 이를 하나 부러뜨리는 것으로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 누가 봐도 공평하다고 인정이 되는 법이었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하나님께서 복수를 허락하신 것이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 법이 가장 무질서하고 통제가 안 되는 무리들에게도 인정이 되는 원시적인 상태의 공평한 법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9.11 사태를 동해보복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미국 뿐 아니라 온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거대한 세계무역센터를 폭파시키고 수천명을 죽인 것에 대한 공정한 재판은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메카의 카바 신전으로 전투기를 보내 신전을 파괴하고 순례객들을 죽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한 사람이 꾸란을 한 권 태움으로써 가슴 아픈 이슬람 테러 사건의 부당함을 항변하고자 했는데 온 세계가 이 일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특히 과격한 무슬림들이 ‘만일 꾸란을 태우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겠다’, ‘정말 꾸란을 태운다면 자기 나라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겠다’는 등 여러 가지 위협적인 발언들이 쏟아냈다.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되는가? 이것이 상식적으로 공평한 행위라고 생각되는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9.11 테러에 직접 가담을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그 일을 잘했다고 지지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꾸란을 태우겠다고 했다가 취소한 사람은 온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고 그런 행위 탓에 이슬람권 선교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더욱 위태롭게 되었고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왜 이런 말을 통해서 무슬림들의 과격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힘을 실어 주는가? 오히려 수천명의 생명을 희생시킨 이슬람의 폭력성을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과격한 무슬림들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희생시킬 것이 예상되지만, 여론은 오히려 그가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노했다고 질타할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할 명분을 주지 않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매우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항상 그들에게 공격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꾸란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없는가? 아니다.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존재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이유 없이는 사람을 죽이지 말지니라’(꾸란17:33) 이 말은 이유가 있으면 죽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불신자(이슬람 외의 종교를 믿는 자)들은 발견하는 대로 살해하라’(꾸란9:5) 꾸란에는 사람을 죽여야 할 다양한 이유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infidel)는 죽여야 한다는 말인데, 그 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을 성전 즉 지하드(Jihad)라고 한다. 이 지하드는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계속하라(꾸란8:39)는 것이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신앙적으로 승화시켜서 이 명령을 실천하는 자들은 천국에 간다(꾸란9:111)고 외치는 성직자들의 설교가 이슬람권에서는 매일 울려 퍼지고 있다. 그들을 친구로 삼아서도 안 된다(꾸란4:144)고 하며 배신자들을 발견하는 대로 죽이라(꾸란4:89)고 명령할 뿐 아니라 너희들의 잔인함을 알 수 있도록 이웃들과 싸우라(꾸란9:123)고 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무슬림 교수들이 방송과 매스컴을 통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어떤 종류의 폭력도 살인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꾸란에 기록된 대로 실천하자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과격한 행동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평화를 빙자하여 우리 곁에 들어와서 우리를 괴롭힐 명분을 찾아내거나 명분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꾸란이 믿지 않는 이웃과 싸우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무슬림이 꾸란을 다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어려서부터 믿지 않는 이웃과 싸우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은 우리의 적이 아니지만, 그들이 참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이슬람의 과격성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의 무슬림들이 예수님의 참 사랑을 체험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뿐만 아니라 9.11 이슬람 테러 9주년 기념일을 맞아 어떤 이가 꾸란을 소각하는 행사를 하겠다는 것에 대한 찬반 여론이 분분했다. 결국 그는 꾸란을 태우지 않았고 앞으로도 태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슬람을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를 죽여야 한다고 곳곳에서 성난 무리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카슈미르 지역에서는 꾸란 소각자 타도를 외치던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로 13명의 시위대와 1명의 경찰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경향뉴스 2010.10.14)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는 꾸란 소각 운동의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이스라엘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연합뉴스 2010.9.11), 뒤늦게 이란에서는 2~3만명의 시위대들이 엥겔럽 광장에 모여 항의했다.(미국의 소리 이란 방송 2010.9.17) 비이슬람권에서도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이슬람을 자극했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그들에게는 법도 질서의식도 없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 무질서한 무리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주신 율법 중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레24:20)’라는 법이다. 즉 누가 이를 하나 부러뜨렸으면 증인들을 통해서 사실로 입증되었을 때 법관 앞에서 가해자의 이를 하나 부러뜨리는 것으로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 누가 봐도 공평하다고 인정이 되는 법이었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하나님께서 복수를 허락하신 것이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 법이 가장 무질서하고 통제가 안 되는 무리들에게도 인정이 되는 원시적인 상태의 공평한 법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9.11 사태를 동해보복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미국 뿐 아니라 온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거대한 세계무역센터를 폭파시키고 수천명을 죽인 것에 대한 공정한 재판은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메카의 카바 신전으로 전투기를 보내 신전을 파괴하고 순례객들을 죽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한 사람이 꾸란을 한 권 태움으로써 가슴 아픈 이슬람 테러 사건의 부당함을 항변하고자 했는데 온 세계가 이 일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특히 과격한 무슬림들이 ‘만일 꾸란을 태우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겠다’, ‘정말 꾸란을 태운다면 자기 나라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겠다’는 등 여러 가지 위협적인 발언들이 쏟아냈다.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되는가? 이것이 상식적으로 공평한 행위라고 생각되는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9.11 테러에 직접 가담을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그 일을 잘했다고 지지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꾸란을 태우겠다고 했다가 취소한 사람은 온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고 그런 행위 탓에 이슬람권 선교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더욱 위태롭게 되었고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왜 이런 말을 통해서 무슬림들의 과격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힘을 실어 주는가? 오히려 수천명의 생명을 희생시킨 이슬람의 폭력성을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과격한 무슬림들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희생시킬 것이 예상되지만, 여론은 오히려 그가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노했다고 질타할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할 명분을 주지 않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매우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항상 그들에게 공격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꾸란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없는가? 아니다.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존재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이유 없이는 사람을 죽이지 말지니라’(꾸란17:33) 이 말은 이유가 있으면 죽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불신자(이슬람 외의 종교를 믿는 자)들은 발견하는 대로 살해하라’(꾸란9:5) 꾸란에는 사람을 죽여야 할 다양한 이유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infidel)는 죽여야 한다는 말인데, 그 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을 성전 즉 지하드(Jihad)라고 한다. 이 지하드는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계속하라(꾸란8:39)는 것이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신앙적으로 승화시켜서 이 명령을 실천하는 자들은 천국에 간다(꾸란9:111)고 외치는 성직자들의 설교가 이슬람권에서는 매일 울려 퍼지고 있다. 그들을 친구로 삼아서도 안 된다(꾸란4:144)고 하며 배신자들을 발견하는 대로 죽이라(꾸란4:89)고 명령할 뿐 아니라 너희들의 잔인함을 알 수 있도록 이웃들과 싸우라(꾸란9:123)고 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무슬림 교수들이 방송과 매스컴을 통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어떤 종류의 폭력도 살인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꾸란에 기록된 대로 실천하자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과격한 행동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평화를 빙자하여 우리 곁에 들어와서 우리를 괴롭힐 명분을 찾아내거나 명분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꾸란이 믿지 않는 이웃과 싸우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무슬림이 꾸란을 다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어려서부터 믿지 않는 이웃과 싸우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은 우리의 적이 아니지만, 그들이 참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이슬람의 과격성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의 무슬림들이 예수님의 참 사랑을 체험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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