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서두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고 선언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잠시 제처 놓으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바로 바울 자신이 택함을 받은 것이며 또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아합 왕 시대에도 당시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두어서 그 남은 자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며, 또 남은 자들을 통해서 미래에도 분명히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언약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취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남은 자의 안목을 가지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볼 때, 거기에 오히려 소망이 있으며 담대할 수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관점에서의 역할은 8가지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1.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선포하는 것 입니다.
2. 그들은 제자상의 나라입니다.
3. 그들은 메시야를 나타낼 민족입니다.
4. 성경을 보관하고 전달할 책임을 가집니다.
5.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홀로 신이신 것을 알려야 합니다.
7. 하나님을 섬김으로 오는 축복을 보여줘야 합니다.
8.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요나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니느웨는 바로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짓밟은 잔인한 나라입니다. 10지파를 뜯어내서 온 세상에 흩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좌우간 그러한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빌리그래함 목사가 공산당이 다스리는 중국에 가서 전도 집회를 해서 그 민족을 축복하고 그 민족을 이스라엘 대신 세계선교에 사용하시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의 반응은 어떠 했습니까? 절대로 못하지요. 안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 백성 구원하는 것을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하는 태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스스로 교만해진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요나는 애국자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종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사역에서 뒤로 물러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믿음에서 넘어진 대다수의 이스라엘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넘어져서 실족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대다수의 이스라엘이 넘어졌다면 실족하기까지 넘어졌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것이며, 영원한 넘어짐이 아니라 일시적인 넘어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논증합니다. 섭리 적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방인의 구원을 본 이스라엘에게 시기심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일시적이라는 말도 이스라엘이 영원히 넘어지고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의 결과로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충만함 즉 온 이스라엘의 회복은 더욱 많은 세상의 부요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례 없는 복을 세상에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이스라엘의 실패'와 '저희를 버리는 것'이라는 말이 서로 상응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부요함'과 '이방인의 부요함'과 '세상의 화목'이라는 말이 서로 상응합니다. 또 '저희의 충만함이리요'과 '저희를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가 같은 의미로 온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특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인 죽은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즉 종말론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마지막 장을 이룰 것이며, 이때 사망권세를 이기고 무너뜨리는 몸의 부활이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이런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를 발견한 바울이 자신의 직무를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이방인 그리스도들로 이루어진 로마교회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이방인을 구원하는 이방인의 사도의 직무가 이스라엘로 시기심을 일으켜서 그들을 구원하는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에 참여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은혜를 입혀 온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이방인의 사도의 직무를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온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두 개의 은유법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남은 온 떡덩이입니다. 또 하나는 뿌리와 가지의 은유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남은 온 떡덩이가 거룩합니다. 뿐만 아니라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합니다.
바울은 이 은유를 통해서 이방 인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대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한 일을 거울로 삼아서 우리도 교만하지 않도록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바로 이스라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렘 11:16)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감람나무는 바로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 가면 지금도 수천 년 된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수백 년 동안 열매를 맺지 않다가 언젠가 갑자기 다시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해라고 말합니다. 이 감람나무는 지금도 싱싱하게 살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롬 11:17)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롬 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바울은 크리스천의 유산은 바로 유대에 뿌리를 두었고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전부가 아닌 일부분( 얼마) wild- olive tree- 가치 없고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우리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 하는 것입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졌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것은 경고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경고는 아닙니다. 즉 우리가 불순종 하면 구원을 뺏는다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도 버렸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들이랴~~ 많은 사람들이 God Bless America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미국이라고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미국도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치면 하나님이 던져 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든지 주님을 따르고 그 나라 안에 경건한 백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축복해주십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없고 모양만 있다면 하나님은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