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네 번째 구원의 원리는 이스라엘을 본으로 삼아서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것이지 우리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바로 모세와 바로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자비에 의함이 아니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어떤 인물입니까? 바로와 모세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별로 다른 점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세는 오히려 자기를 키워주고 세워준 애굽을 배신한 배신자이며, 자기 의를 내세우다가 사람을 쳐 죽인 살인자에 불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모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자 바로는 어떤 인물입니까? 사실 바로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스스로 이러한 계획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 했지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바로 자기들이 신으로 섬기는 대상을 향해서 하나님이 조롱 하신 것이며 무참히 짓밟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자 누가 참신인지 보라 하는 것입니다. 나일 강을 신으로 섬기느냐- 내가 피로 물들게 하리라. 개구리를 신으로 섬기느냐? 온 천지에 올라와서 죽어 버린 개구리 썩는 냄새 한번 맞다 보라 하십니다. 오히려 강퍅해진 바로의
마음을 통해서 천하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선택도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것이지 그 어떤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쯤 이런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우리의 공로나 행위나 선에 근거 한 것이 아니고 절대 주권에 의한 선택이고, 섭리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의 책임은 어떤 관계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는데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셔 놓으시고, 어떤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으시고 왜 우리를 탓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은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이것을 토기장이의 권한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입 닥치라는 말이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라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 우리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빗으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토기가 잘못 구워지면 부숴드려서 다시 반죽하여 빗는 것과 같이 우리를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한된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완전히 다 알 수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실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22-24절 내용은 절말 해석하기가 아주 어려운 본문입니다.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우리의 선택의 관계는 너무나 신비하고 우리의 논리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영역 중에 하나의 문제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이것입니다. 천지를 창조 하신 하나님께서 만약에 누구를 악인으로 태어나게 하실지라도 진로를 받기로 정해서 태어나게 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그런 권리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란 말은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은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제한할 대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준비된 진로의 그릇의 뜻은 하나님이 준비 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준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로가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입니다. 다섯 번이나 계속 되자 나중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불신자나 회의론자들에겐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이 세상의 모든 세세한 부분들까지 계획 하신대로 진행 한다면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책임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다 만드셨는데 거기에 우리의 선택의 자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못된 것에 피해자이지 왜냐면 꼭두각시이기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을 수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즉 모든 악의 저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므로 하나님을 원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장모를 죽인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동성연애자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악으로-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악의 근원이라는 말을 부정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의 제한된 지식으로 완전히 여러분에게 설명을 드릴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요지는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행하신다 하드라도 우리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55:8-9 말씀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의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제한 된 지식을 가졌고 하나님의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체의 그림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전체의 그림을 다 볼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만이 풀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오히려 더 감사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다 알게 하셨더라면 오히려 더 머리가 빠개졌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도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의 선택과 거기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존재 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이해는 못해도 이 둘 다를 저는 가르쳐야 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성경은 진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3위 일체를 이해 못하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부분은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 신앙인줄 믿습니다. 바울은 계속 해서 구약에서 두 부분은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이방에게 미칠 것을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예언 된 것을 제시 하면서 (롬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은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 예수그리스도-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예수 그리스도)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 8: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

요한1:10-13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롬 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러분 야곱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사귀고 싶지 않은 사람의 유형입니다. 사랑받지 못할 밉상의 대명사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항상 기회를 보는 사람 형을 속이고, 삼촌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사람을 요리조리 이용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것까지도 자기 꾀로 얻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야곱을 사랑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 하셨습니다.

여러분 야곱을 사랑하셨다면 저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불신자를 향한 마음을 닫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9장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지요? 바울이 불신의 이스라엘을 향한 불타는 열정으로 시작된 거 기억 하실 것입니다. 예정과 선택의 잘못된 개념으로 전도를 포기하는 핑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의 근원이 아니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에 오늘 믿음으로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