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되는 말, 덕이 되는 말』(Works that Hurt Words that Heal /by Carole Mayhall)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커피 포트가 마지막 트림을 하더니 잠잠해졌습니다. 앤은 뜨거
운 커피를 밝은 색깔의 잔들에 부어 기도모임에 온 여인들에게 한 잔씩 돌렸습니다. 대화가 한창 무르익어 갔습니다.

“오는 길에 론다의 집을 지나쳐 왔거든요. 그런데, 그 집 팔려고 내 놓았던데요.”
“그래, 맞아요. 남편과 헤어졌다나봐요. 내 생각에는 제3의 여인이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들었어요. 정말 큰 문제에요. 그 사람 아들이 어젯밤에 붙잡힌 깡패들 속에 들어있었다면서요?” “그녀가 너무 심하게 애들을 다루지 않나 싶더니…….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요, 글쎄.” “맞아요. 정말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도 사람들과 함께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러 모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비방입니다. 깜짝 놀랄지도 모르지만, 그렇습니다. 그것은 비방입니다. 비방이란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3:32에서 10명의 정탐꾼이 약속의 땅에 대해서 한<부정적인 보고>도 이에 해당합니다.

야고보서 4장11절 말씀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이 귀절을 알프레드 플러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비방은 악의가 담긴 말이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흠을 들추기 좋아하는 태도가 문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판단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합니다.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판하기 위해서, 그것도 깍아내리기 위해서 지켜봅니다. ….
판단은 하나님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침해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법이 틀렸기나 한 것처럼 그 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법보다 자신을 더 우위에 둡니다. 그리고는 하나님만이 앉으실 수 있는 재판석에 올라 앉아 하나님만이 내리실 수 있는 판결을 내립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갖은 수모와 채찍질, 살을 찢기는 고통과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을 닮아 신실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우리의 언어습관을 새롭게 고쳐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수군수군)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11:13)


사순절 세번째 주일에, 이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