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인간이 분노(anger, resentment), 무력감을 느낀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마태복음(6:13)의 주기도문은 모든 권세는 그 자신이 힘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권세를 이웃과 지구의 관리를 위해 인간들이 하나님의 목적인 청지기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하고 회복시키는데 쓰도록 하나님에게서 받았다. 그러나 나누고, 같이 쓰도록 주어진 힘(권세)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데 사용되고, 파괴적인데 사용되므로 책임감 있게 사용되지 못하므로 분노, 무력감 같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분노는 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서 고통의 한 표현이다. 분노의 문제가 옳게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를 유발시키는 갈등과 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개인과 가정에 문제를 일으켜 왔다. 나아가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발전할 수 있고 분노의 표출로 인하여 야기되는 문제를 보게 된다. 분노는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한 사실이고 기본 감정의 하나이다. 그러나 누군가 의하여 위협을 받거나 강요당할 때, 옳지 않은 방법으로 쓰여지는 권위에 의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통제를 당했을 때 “모욕을 받고 있다”는 유쾌하지 않은 의식이 저항 에너지를 생산시키는데 이것이 분노이다. 분노는 신체적으로 심각한 긴장 상태를 유발시킨다. 고통을 일으키는 분노의 원인을 알 때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인정한다.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어떤 이유 또는 분노의 처리 방법 같은 인자는 인간의 성격, 역사, 문화, 가치관을 반영한다. 분노는 다른 사람/사람들에 대하여 외부적으로는 폭력이나 공격 같은 파괴적인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내부적으로는 비통감, 죄의식, 우울증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분노에 대한 적절한 표현 방식을 배우므로 파괴적일 수 있는 분노의 표현을 최소화하고 창조적 가능성을 강화할 수 있다. 그러면 변화가 가능한 표현을 할 수 있으므로 폭발해 버릴 것이 아니라 변화가 가능한 중심점을 변화시켜야 된다.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본인의 분노까지 포함되므로 목회적 배려의 차원에서 분노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적으로 분노는 인간사에 나타난 위험성으로 인하여 7가지 죄악의 하나라고 한다. 분노에는 슬픔의 감정이 내제해 있으며, 복수하고 싶은 마음의 상태 또는 그 폭발을 말하며,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벌을 주고 싶은 욕망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분노를 가진 사람은 자극을 잘 받고, 짜증을 잘 내며, 초조해 하는데 이러한 사람은 분노를 폭발할 경향을 가진 사람이다. 분노는 어떤 위협, 억제, 언어적 공격, 실망 또는 좌절감 같은 환경을 자극함으로 나타나는 급한 정서적 반응으로 자율 신경 계통에 나타나는 강하고 위급한 반응으로 특징 된다.
2. 분노의 기전과 원인
엘리자베스 존슨은 분노는 사랑의 반대말은 아니고 다른 사람이나 그룹, 세계에 대한 좋지 않은 관계인 감정의 신호라고 말했다. 분노는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에게 대한 연결의 양식으로 내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 뚜렷한 관심의 표현으로 분노는 항상 우리 안에서 사회 관계의 도덕적 특성을 나타나는 내재해 있는 저항의 신호이다. 극단적이고 강한 분노는 우리가 관계하는 다른 사람 또는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강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외침의 소리를 들으시며 억압하고 고통 주는 사람으로 인한 그들의 고통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신다. 불꽃 속의 하나님의 음성(출 3:14)으로 사람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아야 도움을 바라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힘을 행사하며,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의논하고 타협하는 삶을 원한다. 평등한 힘(power)의 관계는 이러한 삶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불평등한 힘의 관계는 평등한 삶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모독을 느끼게 만드는데 힘이란 단어는 잘못 이해하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억압함으로 얻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불평등한 힘의 관계에서는 남녀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의논하고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선한 일이 침해받거나, 모독을 받는다는 인식이 있으면 거기에 반하여 행동하게 되는 저항하는 에너지가 생산시키는데 이것이 분노의 표출이다. 분노로 인한 에너지 방출이 지나치면 파괴적이 되고, 확대되면 증오와 폭력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과보호 속에서 자란 청소년이 폭력적이 되는 이유는 부모들이 자녀들 스스로가 해야 할 일, 본인이 해야하는 이, 할 수있는 일까지 해주었으므로 자신의 삶을 사는 방법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였다는데 대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힘의 역학 관계가 불평등했던 이조시대의 가부장 사회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여성들에게 억압적이었다. 사회의 전통은 여성들이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억제했으며, 여성들이 분노의 감정을 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여성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거나, 또는 회피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여성이 분노의 감정을 표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죄악이라고 까지 평가받았다.
가부장 사회는 남성들이 여성들의 힘을 빼앗을 때만 자신들이 힘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가부장적인 남녀관계가 두드러진 사회의 남녀관계는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의논하고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는 여성은 허탈감에 빠지며 분노에 쌓이게 된다. 이 때를 “분노를 느낀다“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모독 감과 수치를 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억압되고 막혀버린 환경 조건으로 인하여 그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현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갈등과 분노를 느낀다. 이들은 막혀버리고 구속받은 자신의 좌절된 소원이나 욕망에 대한 성취를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서라도 실현하려고 한다. 이들 여성들은 자신의 좌절된 욕망과 가치관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남편이나 자식을 자신의 뜻대로 은밀히 통제하고자 하므로 그들은 어머니나 아내에게서 “조정 당하였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래서 부인이나 어머니에서부터 도망가고자 노력하고 가부장 사회의 남성들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외롭게 된다. 이런 악순환은 나아가 남편의 불륜 같은 가정문제로 이끄는 도화선이 된다.
전통적인 한국의 가정 제도인 가부장제의 관습에서 보이는 오류들이 분노를 발생시켰다. 분노는 고통의 한 표현으로 그 특징적인 예가 한국인들이 말하는 “한(恨)”으로 “한이 맺혔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은 한국인들에게 쓰여지는 언어로 과거에는 여성들에게 쓰여진 말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쓰여지는 대명사가 되었다. 한은 학대, 폭력, 착취를 받음으로 발생하는 마치 몸의 세포들이 찢어지는, 찢기는 것 같이 마음의 세포가 실질적으로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이고 신체적인 분노와 비통, 쓴맛의 상태를 통칭한다. 많은 한인여성들이 실제로 통증을 느끼며 살아간다. 우리는 옛적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할머니들이 얼마나 많은 속쓰림이나 한덩어리가 온몸을 휘젓고 다닌다고 말하여 내과 병원에를 드나들었는지 안다.
분노는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모욕이나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느끼는 감정으로 기분을 상하고 불쾌함과 화를 내게 만들기 때문에 발생하며, 이러한 갈등으로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억압된 감정들이 오래 축적이 되면 한국인에게서는 한(恨)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한은 불의 하게 받은 고통에 반하여 오는 해결되지 않은 강열한 분노의 감정이다.
이때의 분노는 자신이나 남에게 어떤 손상이나 결과가 올는지를 무시하고 좌절의 원인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사에 반대하여 발생하는 저항할 수 없는 힘 때문에 무력감이 생기며, 완전히 버려졌다는 느낌과 더불어 그 슬픔으로 인하여 온 몸이 뒤틀리고 몸부림치게 만드는 내장 장기에 오는 급한 통증과 불의에 저항하여 복수하고자 하는 집요한 충동, 욕망을 들을 말한다.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는“ 이라고 말씀하신 그 복수(히, naqam)은 남성 명사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사62:4)이다. 복수는 분노(영,rage, 히,chema)와 질투(히,qinah)와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분노를 의미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분노(anger)는 남성명사로 코가 나팔꽃이 핀 것 같이 콧구멍이 벌렁벌렁할 정도의 분노를 말한다. 로마 신화에서 복수의 이름은 휴리(fury, 뜻, 분노)이다. 여성명사로 어원이 야캄(히브리어, yacham)에서 오는데 분노 외에도 따뜻하게 하다, 임신 또는 배란으로 인한 성적 흥분 등의 뜻도 가지고 있다. 독하고 악한 복수하고 싶게 만드는 분노는 여성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한은 감정과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상처이다. 대개의 분노는 방어기전을 통하여 해결되나 해결되지 않는 분노는 자신에게 “버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과 “무력감”으로 나타난다. 해결되지 않는 분노는 쓴 물을 단물로 만든 “마라의 물(출 15:22-27)” 같이 해결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자꾸만 쓴 물이 계속 솟아나게 된다.
한(한)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심하면 마음의 상태는 찢어지고, 실제로 통증을 느낀다. 계속되는 외부로부터 폭력이나 억압으로 또다시 마음이 상처를 받게되면 희생자는 더 깊은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 한인여성의 통증의 호소가 급성일 때의 배경을 찾아보면 남편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거나 버림을 받았을 때이다. 자신의 존엄성은 유린되었고, 마음은 상처를 받았으며, 통증은 상처받은 마음속에서 계속 악화된다. 가부장 제도는 여성의 상처받은 마음에 계속 상처를 주고, 마음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는 한을 만든다. 안드류 박 교수는 그의 저서, The Wounded Heart of God (하나님의 상처받은 마음,1993)에서 한(恨)의 특징은 “좌절된 희망, 아픔, 분노의 쓴맛으로 상처받은 마음” 이라고 정의했다.
분노가 근원이 되는 한의 해결 방법은 한의 원인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를 지식으로 배워 본인 자신이 변형돼 분노를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주여 왜 나를 버리시었나이까?” 라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도같이 하나님께 고통과 통증을 기도로 알리고 가져가게 하심으로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체 방어를 상실한 한은 체념과 자기포기, 자기 희생을 하는 것이 특징이며 즐겁고 보람된 것이 아닌 버려진, 광야와 같이 황폐한, 쓴,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게된다. 이런 것은 자신을 버리는 멋있고 바람직한 희생의 방법이 아니다.
마라의 쓴 물 (출 15:22-27)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갔는데 마라(뜻; 쓰다) 지방에 이르러 물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써서 마실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무를 주어 던지니까 맛이 달아져서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마르 (mar, 영,bitter)의 뜻은 슬픈, 쓰라리게 하는, 마음, 감정 등이 몹시 상하게되는. 원한이나 재앙 등이 더욱 악화되는, 화나게 하는, 격분시키는, 몹시 불쾌한, 난폭한, 황폐한, 쓴 물(출 15:23), 쓴 음식(잠 27:7, 사 5:20), 쓴, 비통, 슬픔이다. 마라의 (쓴)물은 먼지와 잉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을 뿐더러 건강에 안 좋고 이익도 안된다고 한다. 그 당시 질투 많은 남편이 부인의 부정 여부를 발견하려고 측정할 때 썼다고 한다. 거짓말을 측정할 때 썼다고 하는데 그 물을 마시면 어떤 측정 가능한 신호를 발산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르(mar)는 가정에 일어난 큰 소동으로 인하여 심장이 터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것을 설명할 때, 불임이나 죽음을 생각할 때, 불만이나 착취, 채워지지 않은 죽음의 소원, 개인적 고통과 곤경, 적개적이고 불확실한 위치에 있을 때, 슬픔 또는 불신자에 대한 주님의 심판, 환멸에서 오는 쓴맛을 의미한다. 마라의 물은 써서 마시지 못하는 물이지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무를 주어서 먹을 물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다.
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이미지이다. 이 분노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지는 분노로 옳은 분노이며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의 메시지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에 대한 수치와 상처에 의한 돌봄의 반응의 한 양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돌보고 보살펴주시므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심도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변화이고, 개조하는 것이다.
3. 결론:
1. 분노의 극복과 치유
(1) 변형/화 (Transformation) 되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 인간은 외부와 내면 즉 마음과 사고의 세포의 형질까지 변할 때를 변형이라고 말한다. 이러기 위하여 분노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나 글로 나눔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분노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관찰하며, 분노를 일으키는 문제를 지적할 때 변형/화이 되는 것이다.
(2) 개인적 차원에서 분노를 일으키게 했던 상대와 용서와 화해로서 재결합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깨어진 관계가 화해되고 회복되는 것이다.
(3) 분노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는 계급차별이나 남녀 성차별 같이 차별이 없고 존경과 공경, 애정이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설립하는것이다.
(4) 자신에 대한 비난을 중단해야 한다.
분노 표현 방법을 바꾸어야 하며,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죄의식을 갖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를 잃게 한 열등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회복할 때 분노를 가진 한 인간에서 자심에 대한 긍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분노를 유발한 억압을 당했던 경험의 나눔이 필요하다. 나눔은 치유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즉 분노를 극복하는 방법은 문제의 인식과 변화이다. 문제가 자신의 무능력이나, 잘못 때문이 아니고, 자신들의 고통의 문제가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절망감에서 벗어나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동시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가치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들에 부여한 존엄성과 창조성을 깨어지고 부서진 황폐한 곳에서부터 회복하고, 이 창조의 힘을 통하여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창조에 참여하며 완성시키는 한 부분에 참여할 수 있다.
2. 화해와 용서
용서하기 보다 더 힘든 화해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시작하셨다.
(1) 인간 사회는 용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공개적 참회는 화해를 가능케 하는데 분노의 문제점을 조사함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용서, 화해로서 닫는다. 바른 화해를 위해서는 과거의 지배의 역사가 인식되어야 하며 참회가 거론되어야하고 이때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가 받아드려지게 된다. 왜냐하면 해결되지 않은 분노, 미움은 새로 힘을 얻은 사람에 의하여 복수의 행동으로 인도되고 계속 새로운 지배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배를 없애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남아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이 한 행동 같이 사회인, 개인적인 과거의 불화, 적의는 치유되어야 한다.
화해는 용서보다 나으며, 일방적이며, 항상 서로 같이 하는 것이다. 화해에 필요한 것은 전화를 들고 전화할 수 있어야 하고, 얼굴을 대면하여 화해의 일이 성사되도록 함이 필요하다. 나와 적의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사람과 화해하며, 이것이 될 때 서로 용서하고 공통의 후일을 위해 같이 일할 수 있는 것이다.
(2) 용서는 기적을 일으키는 흔한 일로서 기대하지 않았던 불가능한 일의 하나로 인간이 성취할 수 있거나, 매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용서는 범죄자의 행동을 수용하거나 용서하는 것은 아니며, 용서는 화해의 한 부분이고 화해의 첫 발자국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적을 용서할 수 있으며,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나를 분노하게 만든 돌아가신 부모도, 오래 전에 상처를 준 사람들이 없어도 용서할 수 있다.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용서와 화해의 대표자이다(창 45:1-15).
“나는 요셉, 당신들이 노예로 팔은 동생”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형제들을 먼저 끌어안고, 아버지의 안부를 물은 요셉의 행동은 용서였다. 용서가 없이는 화해가 이루어 질 수 없다. 요셈의 용서가 없었다면 유월절과 출애굽, 온 우주의 역사를 바꿔버린 구세주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탄생과 그로인한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고난의 계절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인간이 분노(anger, resentment), 무력감을 느낀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마태복음(6:13)의 주기도문은 모든 권세는 그 자신이 힘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권세를 이웃과 지구의 관리를 위해 인간들이 하나님의 목적인 청지기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하고 회복시키는데 쓰도록 하나님에게서 받았다. 그러나 나누고, 같이 쓰도록 주어진 힘(권세)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데 사용되고, 파괴적인데 사용되므로 책임감 있게 사용되지 못하므로 분노, 무력감 같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분노는 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서 고통의 한 표현이다. 분노의 문제가 옳게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를 유발시키는 갈등과 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개인과 가정에 문제를 일으켜 왔다. 나아가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발전할 수 있고 분노의 표출로 인하여 야기되는 문제를 보게 된다. 분노는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한 사실이고 기본 감정의 하나이다. 그러나 누군가 의하여 위협을 받거나 강요당할 때, 옳지 않은 방법으로 쓰여지는 권위에 의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통제를 당했을 때 “모욕을 받고 있다”는 유쾌하지 않은 의식이 저항 에너지를 생산시키는데 이것이 분노이다. 분노는 신체적으로 심각한 긴장 상태를 유발시킨다. 고통을 일으키는 분노의 원인을 알 때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인정한다.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어떤 이유 또는 분노의 처리 방법 같은 인자는 인간의 성격, 역사, 문화, 가치관을 반영한다. 분노는 다른 사람/사람들에 대하여 외부적으로는 폭력이나 공격 같은 파괴적인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내부적으로는 비통감, 죄의식, 우울증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분노에 대한 적절한 표현 방식을 배우므로 파괴적일 수 있는 분노의 표현을 최소화하고 창조적 가능성을 강화할 수 있다. 그러면 변화가 가능한 표현을 할 수 있으므로 폭발해 버릴 것이 아니라 변화가 가능한 중심점을 변화시켜야 된다.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본인의 분노까지 포함되므로 목회적 배려의 차원에서 분노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적으로 분노는 인간사에 나타난 위험성으로 인하여 7가지 죄악의 하나라고 한다. 분노에는 슬픔의 감정이 내제해 있으며, 복수하고 싶은 마음의 상태 또는 그 폭발을 말하며,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벌을 주고 싶은 욕망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분노를 가진 사람은 자극을 잘 받고, 짜증을 잘 내며, 초조해 하는데 이러한 사람은 분노를 폭발할 경향을 가진 사람이다. 분노는 어떤 위협, 억제, 언어적 공격, 실망 또는 좌절감 같은 환경을 자극함으로 나타나는 급한 정서적 반응으로 자율 신경 계통에 나타나는 강하고 위급한 반응으로 특징 된다.
2. 분노의 기전과 원인
엘리자베스 존슨은 분노는 사랑의 반대말은 아니고 다른 사람이나 그룹, 세계에 대한 좋지 않은 관계인 감정의 신호라고 말했다. 분노는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에게 대한 연결의 양식으로 내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 뚜렷한 관심의 표현으로 분노는 항상 우리 안에서 사회 관계의 도덕적 특성을 나타나는 내재해 있는 저항의 신호이다. 극단적이고 강한 분노는 우리가 관계하는 다른 사람 또는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강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외침의 소리를 들으시며 억압하고 고통 주는 사람으로 인한 그들의 고통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신다. 불꽃 속의 하나님의 음성(출 3:14)으로 사람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아야 도움을 바라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힘을 행사하며,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의논하고 타협하는 삶을 원한다. 평등한 힘(power)의 관계는 이러한 삶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불평등한 힘의 관계는 평등한 삶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모독을 느끼게 만드는데 힘이란 단어는 잘못 이해하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억압함으로 얻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불평등한 힘의 관계에서는 남녀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의논하고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선한 일이 침해받거나, 모독을 받는다는 인식이 있으면 거기에 반하여 행동하게 되는 저항하는 에너지가 생산시키는데 이것이 분노의 표출이다. 분노로 인한 에너지 방출이 지나치면 파괴적이 되고, 확대되면 증오와 폭력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과보호 속에서 자란 청소년이 폭력적이 되는 이유는 부모들이 자녀들 스스로가 해야 할 일, 본인이 해야하는 이, 할 수있는 일까지 해주었으므로 자신의 삶을 사는 방법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였다는데 대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힘의 역학 관계가 불평등했던 이조시대의 가부장 사회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여성들에게 억압적이었다. 사회의 전통은 여성들이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억제했으며, 여성들이 분노의 감정을 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여성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거나, 또는 회피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여성이 분노의 감정을 표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죄악이라고 까지 평가받았다.
가부장 사회는 남성들이 여성들의 힘을 빼앗을 때만 자신들이 힘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가부장적인 남녀관계가 두드러진 사회의 남녀관계는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좀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하여 의논하고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는 여성은 허탈감에 빠지며 분노에 쌓이게 된다. 이 때를 “분노를 느낀다“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모독 감과 수치를 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억압되고 막혀버린 환경 조건으로 인하여 그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현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갈등과 분노를 느낀다. 이들은 막혀버리고 구속받은 자신의 좌절된 소원이나 욕망에 대한 성취를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서라도 실현하려고 한다. 이들 여성들은 자신의 좌절된 욕망과 가치관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남편이나 자식을 자신의 뜻대로 은밀히 통제하고자 하므로 그들은 어머니나 아내에게서 “조정 당하였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래서 부인이나 어머니에서부터 도망가고자 노력하고 가부장 사회의 남성들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외롭게 된다. 이런 악순환은 나아가 남편의 불륜 같은 가정문제로 이끄는 도화선이 된다.
전통적인 한국의 가정 제도인 가부장제의 관습에서 보이는 오류들이 분노를 발생시켰다. 분노는 고통의 한 표현으로 그 특징적인 예가 한국인들이 말하는 “한(恨)”으로 “한이 맺혔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은 한국인들에게 쓰여지는 언어로 과거에는 여성들에게 쓰여진 말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쓰여지는 대명사가 되었다. 한은 학대, 폭력, 착취를 받음으로 발생하는 마치 몸의 세포들이 찢어지는, 찢기는 것 같이 마음의 세포가 실질적으로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이고 신체적인 분노와 비통, 쓴맛의 상태를 통칭한다. 많은 한인여성들이 실제로 통증을 느끼며 살아간다. 우리는 옛적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할머니들이 얼마나 많은 속쓰림이나 한덩어리가 온몸을 휘젓고 다닌다고 말하여 내과 병원에를 드나들었는지 안다.
분노는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모욕이나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느끼는 감정으로 기분을 상하고 불쾌함과 화를 내게 만들기 때문에 발생하며, 이러한 갈등으로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억압된 감정들이 오래 축적이 되면 한국인에게서는 한(恨)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한은 불의 하게 받은 고통에 반하여 오는 해결되지 않은 강열한 분노의 감정이다.
이때의 분노는 자신이나 남에게 어떤 손상이나 결과가 올는지를 무시하고 좌절의 원인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사에 반대하여 발생하는 저항할 수 없는 힘 때문에 무력감이 생기며, 완전히 버려졌다는 느낌과 더불어 그 슬픔으로 인하여 온 몸이 뒤틀리고 몸부림치게 만드는 내장 장기에 오는 급한 통증과 불의에 저항하여 복수하고자 하는 집요한 충동, 욕망을 들을 말한다.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는“ 이라고 말씀하신 그 복수(히, naqam)은 남성 명사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사62:4)이다. 복수는 분노(영,rage, 히,chema)와 질투(히,qinah)와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분노를 의미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분노(anger)는 남성명사로 코가 나팔꽃이 핀 것 같이 콧구멍이 벌렁벌렁할 정도의 분노를 말한다. 로마 신화에서 복수의 이름은 휴리(fury, 뜻, 분노)이다. 여성명사로 어원이 야캄(히브리어, yacham)에서 오는데 분노 외에도 따뜻하게 하다, 임신 또는 배란으로 인한 성적 흥분 등의 뜻도 가지고 있다. 독하고 악한 복수하고 싶게 만드는 분노는 여성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한은 감정과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상처이다. 대개의 분노는 방어기전을 통하여 해결되나 해결되지 않는 분노는 자신에게 “버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과 “무력감”으로 나타난다. 해결되지 않는 분노는 쓴 물을 단물로 만든 “마라의 물(출 15:22-27)” 같이 해결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자꾸만 쓴 물이 계속 솟아나게 된다.
한(한)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심하면 마음의 상태는 찢어지고, 실제로 통증을 느낀다. 계속되는 외부로부터 폭력이나 억압으로 또다시 마음이 상처를 받게되면 희생자는 더 깊은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 한인여성의 통증의 호소가 급성일 때의 배경을 찾아보면 남편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거나 버림을 받았을 때이다. 자신의 존엄성은 유린되었고, 마음은 상처를 받았으며, 통증은 상처받은 마음속에서 계속 악화된다. 가부장 제도는 여성의 상처받은 마음에 계속 상처를 주고, 마음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는 한을 만든다. 안드류 박 교수는 그의 저서, The Wounded Heart of God (하나님의 상처받은 마음,1993)에서 한(恨)의 특징은 “좌절된 희망, 아픔, 분노의 쓴맛으로 상처받은 마음” 이라고 정의했다.
분노가 근원이 되는 한의 해결 방법은 한의 원인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를 지식으로 배워 본인 자신이 변형돼 분노를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주여 왜 나를 버리시었나이까?” 라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도같이 하나님께 고통과 통증을 기도로 알리고 가져가게 하심으로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체 방어를 상실한 한은 체념과 자기포기, 자기 희생을 하는 것이 특징이며 즐겁고 보람된 것이 아닌 버려진, 광야와 같이 황폐한, 쓴,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게된다. 이런 것은 자신을 버리는 멋있고 바람직한 희생의 방법이 아니다.
마라의 쓴 물 (출 15:22-27)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갔는데 마라(뜻; 쓰다) 지방에 이르러 물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써서 마실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무를 주어 던지니까 맛이 달아져서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마르 (mar, 영,bitter)의 뜻은 슬픈, 쓰라리게 하는, 마음, 감정 등이 몹시 상하게되는. 원한이나 재앙 등이 더욱 악화되는, 화나게 하는, 격분시키는, 몹시 불쾌한, 난폭한, 황폐한, 쓴 물(출 15:23), 쓴 음식(잠 27:7, 사 5:20), 쓴, 비통, 슬픔이다. 마라의 (쓴)물은 먼지와 잉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을 뿐더러 건강에 안 좋고 이익도 안된다고 한다. 그 당시 질투 많은 남편이 부인의 부정 여부를 발견하려고 측정할 때 썼다고 한다. 거짓말을 측정할 때 썼다고 하는데 그 물을 마시면 어떤 측정 가능한 신호를 발산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르(mar)는 가정에 일어난 큰 소동으로 인하여 심장이 터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것을 설명할 때, 불임이나 죽음을 생각할 때, 불만이나 착취, 채워지지 않은 죽음의 소원, 개인적 고통과 곤경, 적개적이고 불확실한 위치에 있을 때, 슬픔 또는 불신자에 대한 주님의 심판, 환멸에서 오는 쓴맛을 의미한다. 마라의 물은 써서 마시지 못하는 물이지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무를 주어서 먹을 물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다.
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이미지이다. 이 분노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지는 분노로 옳은 분노이며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의 메시지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에 대한 수치와 상처에 의한 돌봄의 반응의 한 양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돌보고 보살펴주시므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심도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변화이고, 개조하는 것이다.
3. 결론:
1. 분노의 극복과 치유
(1) 변형/화 (Transformation) 되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 인간은 외부와 내면 즉 마음과 사고의 세포의 형질까지 변할 때를 변형이라고 말한다. 이러기 위하여 분노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나 글로 나눔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분노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관찰하며, 분노를 일으키는 문제를 지적할 때 변형/화이 되는 것이다.
(2) 개인적 차원에서 분노를 일으키게 했던 상대와 용서와 화해로서 재결합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깨어진 관계가 화해되고 회복되는 것이다.
(3) 분노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는 계급차별이나 남녀 성차별 같이 차별이 없고 존경과 공경, 애정이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설립하는것이다.
(4) 자신에 대한 비난을 중단해야 한다.
분노 표현 방법을 바꾸어야 하며,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죄의식을 갖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를 잃게 한 열등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회복할 때 분노를 가진 한 인간에서 자심에 대한 긍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분노를 유발한 억압을 당했던 경험의 나눔이 필요하다. 나눔은 치유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즉 분노를 극복하는 방법은 문제의 인식과 변화이다. 문제가 자신의 무능력이나, 잘못 때문이 아니고, 자신들의 고통의 문제가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절망감에서 벗어나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동시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가치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들에 부여한 존엄성과 창조성을 깨어지고 부서진 황폐한 곳에서부터 회복하고, 이 창조의 힘을 통하여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창조에 참여하며 완성시키는 한 부분에 참여할 수 있다.
2. 화해와 용서
용서하기 보다 더 힘든 화해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시작하셨다.
(1) 인간 사회는 용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공개적 참회는 화해를 가능케 하는데 분노의 문제점을 조사함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용서, 화해로서 닫는다. 바른 화해를 위해서는 과거의 지배의 역사가 인식되어야 하며 참회가 거론되어야하고 이때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가 받아드려지게 된다. 왜냐하면 해결되지 않은 분노, 미움은 새로 힘을 얻은 사람에 의하여 복수의 행동으로 인도되고 계속 새로운 지배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배를 없애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남아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이 한 행동 같이 사회인, 개인적인 과거의 불화, 적의는 치유되어야 한다.
화해는 용서보다 나으며, 일방적이며, 항상 서로 같이 하는 것이다. 화해에 필요한 것은 전화를 들고 전화할 수 있어야 하고, 얼굴을 대면하여 화해의 일이 성사되도록 함이 필요하다. 나와 적의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사람과 화해하며, 이것이 될 때 서로 용서하고 공통의 후일을 위해 같이 일할 수 있는 것이다.
(2) 용서는 기적을 일으키는 흔한 일로서 기대하지 않았던 불가능한 일의 하나로 인간이 성취할 수 있거나, 매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용서는 범죄자의 행동을 수용하거나 용서하는 것은 아니며, 용서는 화해의 한 부분이고 화해의 첫 발자국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적을 용서할 수 있으며,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나를 분노하게 만든 돌아가신 부모도, 오래 전에 상처를 준 사람들이 없어도 용서할 수 있다.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용서와 화해의 대표자이다(창 45:1-15).
“나는 요셉, 당신들이 노예로 팔은 동생”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형제들을 먼저 끌어안고, 아버지의 안부를 물은 요셉의 행동은 용서였다. 용서가 없이는 화해가 이루어 질 수 없다. 요셈의 용서가 없었다면 유월절과 출애굽, 온 우주의 역사를 바꿔버린 구세주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탄생과 그로인한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고난의 계절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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