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1. 면죄부 판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중세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된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어거스틴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면죄부는 카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다. 한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성인들에 의해 축적된 선행의 보고(寶庫)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죄를 지은 이는 보속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면죄부를 돈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였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 연옥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테첼은 신자들을 유인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레데릭 현자가 작센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다.
2. 95개의 논제
비텐베르크성 교회. 지역의 개 교회도 일년에 한번씩은 돈을 받고 성물들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일부 또는 전체 면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이 교회도 95개 논제를 내 건 다음 날, 제성기념일에 면죄부를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아, 교회의 5000점 이상되는 성물들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이 교회는 더이상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되어 있지않고 개신교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또한 여기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 이종배찬이 처음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68조).
마지막 논제에서 루터는 기독자는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3. 종교개혁 정신의 전파
애당초 학자들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된다. 이렇듯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효율적으로 전파되는 일에 중대한 기여를 한 것은 바로 인쇄술이었다. 이 기술로 인해 개혁 정신은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지역으로 퍼질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가 1450년 경에 발명한 인쇄술로 처음 찍어낸 것은 면죄부였는데, 동일한 인쇄술이 반 세기를 넘긴 후에는 면죄부의 존재 가치를 흔드는 데 오히려 더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4. 십자가의 신학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카톨릭 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어거스틴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전략은 커다란 실패였다.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어거스틴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여기서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알려진 자신의 신학 원칙을 발표하면서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논제 19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 만드신 것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롬 1:20)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
논제 20 :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보이는 것, 하나님의 ‘등’ (출33:23)을 인식하는 사람은 도리어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논제 21 :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실 그대로 말한다.
5. 카예탄 주교에게 소환당함
도미니칸 수도회의 원장이기도 했던 카예탄 추기경.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었던 그는 루터와 논쟁할 생각은 전혀 없이 단지 ‘나는 뉘우친다’는 말 한마디만 들을 계획이었으나 모임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이 만남은 면죄부의 돈과 관계있는 푸거 가문의 집에서 일어났다. 추기경은 1518년 10월 12 -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교회회의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카톨릭의 성사들보다 오히려 ‘믿음’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카예탄의 논리는 루터가 교황의 권위로 교령에 승복해야 하고, 따라서 면죄부에도 승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교령이 성서에 위배되며 면죄부는 축재수단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공로와는 같을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현자 프레데릭 선제후(1486-1525). 교황과 황제로부터 루터를 보호하고 개혁이 자신의 영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종교개혁을 촉진시켰다. 선제후가 루터와 그의 일에 대해 품었던 열심은 둘이 서로 만나거나 말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놀랍다.
1. 면죄부 판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중세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된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어거스틴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면죄부는 카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다. 한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성인들에 의해 축적된 선행의 보고(寶庫)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죄를 지은 이는 보속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면죄부를 돈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였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 연옥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테첼은 신자들을 유인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레데릭 현자가 작센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다.
2. 95개의 논제
비텐베르크성 교회. 지역의 개 교회도 일년에 한번씩은 돈을 받고 성물들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일부 또는 전체 면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이 교회도 95개 논제를 내 건 다음 날, 제성기념일에 면죄부를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아, 교회의 5000점 이상되는 성물들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이 교회는 더이상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되어 있지않고 개신교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또한 여기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 이종배찬이 처음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68조).
마지막 논제에서 루터는 기독자는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3. 종교개혁 정신의 전파
애당초 학자들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된다. 이렇듯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효율적으로 전파되는 일에 중대한 기여를 한 것은 바로 인쇄술이었다. 이 기술로 인해 개혁 정신은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지역으로 퍼질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가 1450년 경에 발명한 인쇄술로 처음 찍어낸 것은 면죄부였는데, 동일한 인쇄술이 반 세기를 넘긴 후에는 면죄부의 존재 가치를 흔드는 데 오히려 더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4. 십자가의 신학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카톨릭 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어거스틴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전략은 커다란 실패였다.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어거스틴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여기서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알려진 자신의 신학 원칙을 발표하면서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논제 19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 만드신 것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롬 1:20)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
논제 20 :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보이는 것, 하나님의 ‘등’ (출33:23)을 인식하는 사람은 도리어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논제 21 :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실 그대로 말한다.
5. 카예탄 주교에게 소환당함
도미니칸 수도회의 원장이기도 했던 카예탄 추기경.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었던 그는 루터와 논쟁할 생각은 전혀 없이 단지 ‘나는 뉘우친다’는 말 한마디만 들을 계획이었으나 모임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이 만남은 면죄부의 돈과 관계있는 푸거 가문의 집에서 일어났다. 추기경은 1518년 10월 12 -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교회회의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카톨릭의 성사들보다 오히려 ‘믿음’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카예탄의 논리는 루터가 교황의 권위로 교령에 승복해야 하고, 따라서 면죄부에도 승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교령이 성서에 위배되며 면죄부는 축재수단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공로와는 같을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현자 프레데릭 선제후(1486-1525). 교황과 황제로부터 루터를 보호하고 개혁이 자신의 영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종교개혁을 촉진시켰다. 선제후가 루터와 그의 일에 대해 품었던 열심은 둘이 서로 만나거나 말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놀랍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