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는 그의 유명한 책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기독교 복음이 성공적으로 전파되려면, 어떤 특정한 문화와의 타협이나 혼합이 아닌, 변혁주의(Transformation)적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이런 역할을 잘 감당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전통 문화를 파괴하거나 지배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국 기독교가 오히려 한국의 무속(Shamanism)에 동화되거나 침식당한 흔적이 더 많다는 판단이다. 가령, 한국 기독교의 예배는 외형적으로는 기독교식이지만, 그 내용은 "아들 낳고, 돈 잘 벌고, 병 고치고, 화를 면케 해달라"는 무속의 염원과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런 무속적인 한국인의 심성을 자극하여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으는데 크게 성공한 목회자도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제 무속 신앙화 현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앞으로 더욱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 기독교의 본질과 그 책임에 더욱 심각한 혼돈을 초래하고야 말 것이다.

우선 한국 무속 전통이 한국 기독교 신앙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측면들을 다시금 상기해 보자. 무엇보다도 한국인은 무속 전통의 영향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한 영적세계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경희대의 김태곤 교수에 의하면, 한국의 무속에서 숭배하는 신은 모두 273가지라고 한다. 자연신들이 22가지 계열이고, 인간신이 11가지 계열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신들 사이에서도 엄연히 어떤 계급 구조가 존재하는데, 그중에 최상의 신으로서의 "하나님 관념"을 가질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무속 신앙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 유일신 사상이나 인격적인 신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이런 무속 신앙을 바탕으로 거부감 없이 기독교의 영적 세계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두 번째 긍정적 측면은, 한국인들의 기독교 신앙의 열심에는 무속적인 기반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애초부터 한국인들은 종교심이 무척 강한 민족이었다. 일찍이 일어나서 목욕재계를 한 후, 정한수를 떠놓고 기원하던 여인네들의 정성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의 새벽 기도회와도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게다. 왜냐하면 이 새벽 기도회는 세계에서 참으로 독특한 한국 기독교만의 특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정 기간 드리는 "특별 새벽기도회"는 한국인들의 무속적인 심성에서 그 발단 동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기도의 내용보다는 의식 자체를 더 중요시하는 무속의 색채가 잔재해 있을 뿐 아니라, 특별히 개인적 이기주의는 무속 신앙의 잔재 요소로 남아 있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상의 긍정적 측면 못지않게 간과하지 못할 부정적인 영향들도 있다. 우선 먼저, 무속의 기복주의적인 신앙관이 기독교 신앙을 대단히 저급하게 변질시켜 놓았다는 주장이다. 가령, 기독교 역시도 내면 또는 정신적인 축복보다는, 오히려 현세적인 축복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는 현상이 드러난다는 게다. 즉, 무병장수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죽어서도 평안을 누리기를 원한다는 식의 내용이 그렇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복이 과연 무엇이고,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릴 틈도 없이, 현실 생활에서 그저 "예수 믿고 복 받으라"는 식으로 강조하다 보니, 기독교가 마치 이러한 "값싼 복"만을 공급해 주는 종교처럼 인식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복을 원하는 자들로 채워지게 되었고,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을 두고 "기적적인 부흥"이니 뭐니 하면서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늘 뒷전에만 있었고, 무속적인 신들이 교회 안에서 오히려 활개를 치지는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기복 사상에 물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복채"를 드리듯이 헌금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러한 현세적인 복을 구하기 전에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쳤던 사실을 기본적으로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부정적인 측면은 기독교가 무속 신앙의 영향에 따라 지극히 비윤리적이고 역사참여와 무관한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무속 신앙은 "강신"(降神)과 "체험"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성령 세례"와 같은 신비 체험만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무속의 굿판에서 드러나는 광신주의나 황홀한 체험을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하는 현상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체험들이 실제 현실 생활로 연결되지 못하는 비윤리적 한계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는 전연 신앙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여서, "사회의 불의나 구조악"에도 항거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기독교인만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의 목회자들이란 신령한 무당이 되어, 재난과 불행이나 추방하고 복을 빌어주는 사람들이나 되고 만 셈이고, 무당이 단골 가정에서 축귀하고 화를 면케 하듯이, 성도들을 심방하여 비슷한 기능이나 담당하고 있지는 않는가 싶다.

결론적으로 한국 기독교와 교회들은 이제 그만 좀 달라져야만 한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먼저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무당이 "큰 굿판"만을 그리워하듯이, 목회자들이 그저 물량주의에만 빠져서 큰 교회 목사만이 마치 유능하고 성공한 목사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올바른 교회관을 확립하고 정체성 있는 지도력으로, 그저 복을 파는 "큰 무당의 역할"이 아니라, 생활 신앙인들을 배출하는 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말이다.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삶의 질이 개선되고, 올바른 역사의 주체로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심성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잘못된 무속 신앙의 악 영향을 차단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성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