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한국 사회와 지구촌을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시대정신은 단연 ‘탈종교화’(de-religionization)다. 한때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던 종교의 권위는 해체되었고, 신성(sacred)이 머물던 자리는 세속적 합리성과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새로운 신들이 차지했다. 각종 통계 지표는 교회의 몰락을 예견하고, 대중은 더 이상 제도권 종교에서 삶의 정답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거대한 엑소더스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먼저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구별됨을 잃어버려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 아니라, 세속의 논리로부터 복음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탈주’다.
탈종교화는 단순히 교인 수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간이 바뀌는 문화적 지각변동이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그의 저작 『세속의 시대』(A Secular Age)에서 이 변화를 단순한 신앙 이탈이 아니라, ‘초월에 대한 감수성 자체’의 소멸로 진단한다. 과학적 합리주의가 세계를 설명 가능한 데이터로 환원하면서 신비가 거세되었고, 현대인은 초월적 경외감보다 당장의 효용성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조직된 종교(organized religion) 대신 개인의 주관적 안녕과 심리적 위안을 중시하는 ‘자기준거적 영성’ — 초월적 권위나 공동체의 규범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느낌과 필요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태도 — 이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자신이 자초한 ‘도덕적 자격의 파산’이다. 현대의 탈종교화는 신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신을 대변한다는 이들의 불일치에서 기인한다. 권위주의와 불투명성, 세속적 욕망을 ‘축복’으로 둔갑시킨 기복주의가 교회를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전락시켰다. 세상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복음의 짠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의 진단은 명확하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그렇다면 탈종교화 시대에 교회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서구 세속화의 도전 앞에서 교회가 취해야 할 자세를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다. 교회는 세상을 모방함으로써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제공할 수 없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구현함으로써 그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신념을 강요하는 ‘성채’에서, 삶의 갈증을 해소하는 ‘샘터’로 재정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짜 신성(fake sacred)에 환멸을 느낀 현대인들은 종교의 외피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연을 만지는 진실한 울림을 갈구한다. 교회는 세상을 가르치려 드는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고통받는 자들의 신음 속에 동참하며 환대와 경청의 미학을 실천하는 ‘영적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예수 자신이 그 모범을 보이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종교의 자리는 사회의 정점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 가장 아픈 곳이어야 마땅하다.
교회의 ‘거룩한 탈주’는 세상을 등지는 은둔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적 가치관이라는 중력을 거스르는 창조적 저항이다. 그 저항의 첫 번째 축은 ‘일상의 성사화’(sacramentalizing daily life)다. 거룩함은 주일 예배당 안에 갇혀 있지 않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이 명령은 제단 위의 예식이 아니라 삶의 현장 전체를 제사의 공간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정직한 상거래, 소외된 이웃을 향한 환대,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감 있는 태도 등 일상의 지극히 작은 일들이 거룩한 제사가 될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이 모방할 수 없는 ‘다름’을 보여줄 수 있다.
두 번째 축은 ‘환대적 공동체’(Hospitable Community)다. 탈종교화 시대의 가장 깊은 상처는 고립과 외로움이다. 성과주의와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에서 탈주하여, 조건 없는 수용과 사랑이 흐르는 대안적 가족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로서 우리는 이 환대의 신학이 결코 낯설지 않다. 조국을 떠나 이방 땅에서 경계인으로 살아온 이산의 경험 자체가, 낯선 이를 향한 환대와 연대의 감수성을 체득하게 한 신학적 훈련장이었기 때문이다. 효율성이 아닌 관계를, 소유가 아닌 존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공동체야말로, 탈종교화의 시대에 현대인이 기꺼이 귀의하고 싶은 마지막 공간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보다 급진적인 신학적 원리가 있다. 그것이 바로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 비움이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7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케노시스는 단순한 겸손의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내려놓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교회가 성장과 영향력과 사회적 인정을 추구할 때, 그것은 세상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다. 교회가 자기를 비울 때, 즉 수적 부흥의 욕망을, 도덕적 우월감을, 제도적 권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공동체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역시 십자가의 케노시스를, 하나님이 전능함을 행사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포기하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 역설적 사건으로 해석한 바 있다. 세상이 모방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자기 비움의 역설이다.
탈종교화는 위기인 동시에 정화(purification)의 기회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던 허례허식과 권력의 거품이 걷히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은, 역설적으로 복음의 순전함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엘리야가 광야에서 지쳐 쓰러졌을 때, 하나님은 강풍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셨다(왕상 19:12). 거대한 제도와 숫자의 소음이 잦아드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교회는 오히려 그 세미한 음성을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우리가 꿈꾸는 ‘거룩한 탈주’는 익숙한 안락함을 떠나 광야에서 그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세속의 거친 파도 앞에서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응답은 숫자의 부흥이 아니라 삶의 변혁이다. 케노시스의 공동체, 일상을 성사화하는 공동체, 환대를 실천하는 공동체 — 이것이 탈종교화의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교회의 거룩한 탈주다.
무너진 성벽 너머에서 씨앗은 피어난다. 껍데기가 벗겨진 자리에 생명의 본질이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