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 없다”라는 글이 있다. 이것은 며칠 전, 지귀연 판사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수괴 사건의 판결문 속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이 문장은 드라마 <소년재판>에 나오는 명대사이다.
지귀연 판사가 “목적이 아무리 선해 보여도, 그 목적을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했다는 점은 다 아는 바이다.
[2] 하지만 지판사가 사용한 내용과 흡사하면서도 그 의도는 사뭇 다르게 활용되고 있는 중국 고사성어 “착벽투광(鑿壁偷光)”이란 문장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사는 중국 전한 시대의 학자 ‘광형’에게서 유래한다. 그는 가난하여 등불을 살 수 없자 이웃집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새어 들어오는 빛으로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배움에 대한 열정과 인내'를 강조하는 긍정적 교훈으로 사용되어 왔다.
[3] 중국 작가 루쉰의 단편소설 『공을기』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하나 있다. “책을 훔친 것은 훔친 것이 아니다(窃书不能算偷).” 그의 논리는 이렇다. “책은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고, 지식은 모두가 나누어야 할 것이므로 남의 책을 가져다 읽는 행위는 단순한 절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가난 때문에 공부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연민과 관용적 시선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하물며 읽는 대상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 ‘성경’이라면 얘기는 더욱 달라진다.
[4] 성경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며, ‘인간의 구원과 직결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정도의 행위는 오히려 선한 목적을 위한 열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이 제사 떡을 먹은 사건은 단순히 규정을 어긴 사례가 아니라 생존의 절박함 속에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5] 또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 역시 규례를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목적이 생명을 살리는 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언급하시며 형식주의적 율법 해석을 바로잡으셨음(마 12:1-21)을 보라. 여기서 중요한 원리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의식을 통해 생명을 억압하려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의식이 생명을 섬기도록 주어졌다”라는 사실이다.
[6] 예수님이라면 “성경이라는 소중한 생명줄을 잡기 위한 의도와 목적은 선하지만, 남의 촛불 활용이라는 수단은 정당하지 못하기에 성경 읽기를 포기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실 것인지 조용히 판단해 보라.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 없다”라는 글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귀연 판사는 자신의 논리를 보다 쉽게 입증하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했다.
[7] “윤 전 대통령이 나름의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엄을 한 건 인정하지만, 군을 동원해서 국회에 들여보낸 수단은 잘못되었기에 내란이 맞다”라는 의미였다.
나는 윤 전 대통령의 계엄에 대해선 가타부타할 마음이 없다. 문제는 비유나 예화를 사용할 때는 정확하고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한단 말이다.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비유나 예화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가 많다.
[8] 마 13:34절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만큼 비유나 예화를 많이 활용하신 분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것들이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의 위험성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교자들은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