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저녁이었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사무실을 나가는데 그날은 'togo'가 아니라 레스토랑을 가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QT모임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어서 혼자 나가봤습니다.
오후 6:30분이 넘은 시간이었는데 그날은 유독 가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둔 가족들, 십대 청소년이 있는 가족들. 모두 앉아서 식사 하면서 대화 나누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저마다 각자의 아픔이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의 상처는 대개 소리 없이 깊어집니다. 큰 사건보다 반복되는 작은 실망, 비교, 무시, 거절, 외로움이 마음에 균열을 만듭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 상처 위에 '괜찮은 척'이라는 얇은 벽을 세웁니다.
신앙생활도 때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닫혀 있고, 찬양은 부르지만 눈물은 삼키고, 기도는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해 보이고 싶고, 믿음 좋아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복음은 상한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단지 우리의 행위를 대신 치르기 위함이 아니라, 깨진 우리의 존재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종종 "시간이 약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상처를 치유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덮어둘 뿐입니다. 치유는 은혜가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보세요. 주님은 배신을 당하셨고, 조롱을 받으셨고, 억울한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사랑에게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처를 몸과 마음으로 받으셨어요. 그래서 우리의 아픔을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단지 '용서받았다'는 선언만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다'는 정체성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내면의 상처는 대개 사랑받지 못했다는 왜곡된 믿음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사랑받은 존재인 것을 나타냅니다.
치유를 경험하려면, 먼저 상처를 인정해야 합니다. "괜찮습니다"가 아니라 "아픕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기도는 멋진 문장이 아니라 솔직한 탄식이면 충분합니다.
혹시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 잊히지 않는 장면, 지워지지 않는 후회가 있습니까??? 주님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깊은 어둠까지 비추는 빛입니다. 복음은 감정의 일시적 위로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회복입니다. 그리고 그 치유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상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 14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