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교회 안에 자주 나타나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시리즈입니다. 매주 한 가지 오해를 살펴보며 성경과 신학과 목회적 관점에서 성찰하여 장애를 가진 성도들이 비장애 성도들과 함께 건강한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지난 글에서는 “장애는 죄에 대한 징벌이다,” “장애인은 연민의 대상이지 동역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 “장애인은 일반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 “장애인은 치유만을 원한다,” 그리고 “모든 장애는 동일하다” 라는 오해를 다루었습니다.
치유와 기적에 대한 간증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능력을 증언해 왔습니다. 병이 나았다는 간증과 의료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던 상황이 뒤집힌 간증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며,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실제로 개입하신다는 증언은 분명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증과 설교가 “강한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치유가 일어난다," “기도 응답이 없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으로 발전할 때, 치유는 믿음의 검증 도구가 됩니다. 그러면 장애를 가진 성도나 고통을 안고 사는 성도들은 자신을 향해 의심과 죄책감을 품게 되며,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영적 부담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가 치유 집회에 참석합니다. 설교자는 "오늘 이 시간 믿음으로 붙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 주십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죄를 내려놓고 회개하십시오"라고 선포합니다. 안수 시간이 되자 부모는 눈물로 자녀를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난 뒤 자녀의 상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며칠 후 교회의 한 리더가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한 분이 아니니 우리가 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 믿음으로 붙들면 반드시 고쳐 주실 것입니다"라고 조언합니다. 처음에는 위로처럼 들렸던 이 말이 반복될수록, 부모의 마음에는 '그렇다면 지금까지 낫지 않은 이유는 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인가? 혹시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나?'라는 의문이 더 깊이 자리 잡게 됩니다.
만성 통증을 안고 살아가는 한 성도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치유 집회에 참석했고, 교회에서도 안수기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증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어느 날 소그룹 모임에서 한 사람이 "제가 병으로 고통받을 때 어떤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깨끗이 고쳐 주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결과로 나타납니다"라고 간증합니다. 그 순간 그는 질병 자체의 고통보다, 자신이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낙인에서 오는 더 깊은 상처를 경험합니다. 결국 그는 교회를 떠납니다. 치유의 간증이 누군가에게는 소망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성적표가 되어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와 장애인을 고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병든 자를 고치며"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야고보서 역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 5:15)라고 약속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말씀을 붙들고 치유를 위해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믿음을 치유의 보장 수단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치유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신비롭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적을 행하며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 후반부에서는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5-37)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이 땅에서 약속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을 끝까지 소망하며 하나님을 신뢰한 삶을 참된 믿음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앞에서 고백한 믿음도 동일한 구조를 보여 줍니다: “왕이여 [느부갓네살 왕]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그들의 믿음은 기적의 결과만을 전제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건져 주실 수 있다는 확신과, 그럼에도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결단이 함께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믿음의 정점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소원을 정직하게 아뢰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완전한 믿음은 고통이 제거되는 결과로만 증명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하는 순종 속에서 믿음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이 “Yes”일 때만 믿음이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응답이 “No”일 때에도 하나님께 머물며 신뢰를 놓지 않는 것 또한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도 함께 점검해야 합니다. 장애에는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폐나 다운 증후군과 함께 태어납니다. 그것은 당사자의 선택이 아니었고, 부모의 선택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을 아셨고 허락하셨으며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의 존재를 단지 문제나 실패의 표지로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언어는 장애를 의학적 진단과 기능의 결핍으로 규정하기 쉽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생명의 존엄과 고유성이 먼저입니다. 이는 장애와 그로 인한 어려움을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장애를 해석하는 방식이 더 깊어져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저는 2004년 스노우보드 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되었고, 지금 전동휠체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치유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고, 여러 기도 제목에서는 분명한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제 몸은 여전히 이전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치유 집회에도 참석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자리 잡았습니다.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더 회개해야 하는지, 누군가가 답을 말해주길 바라기도 했습니다. 치유가 지연되는 현실이 믿음의 부족으로 해석될 때, 사람은 고난뿐 아니라 죄책감까지 함께 짊어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방식으로만 자신을 증명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치유의 부재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빚으셨고, 조건적 요구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도록 저를 이끄셨습니다. 그때 저는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고침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로 받아들이는 자유, 예수님이 고난 가운데 동행하신다는 기쁨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의 은혜가 치유를 간절히 구하다가 지친 이들과, 실망 속에서 스스로를 정죄하는 이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장애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는 분명합니다.
1. 교회는 기도와 간증의 언어를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증을 나눌 때, 그것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 안에서 일어난 독특한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한 치유되지 않았지만 오랜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켜 온 성도들의 이야기도 동일한 무게로 소개해야 합니다.
2. 교회는 장애를 믿음 부족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기도와 상담에서 질병과 장애의 원인을 곧바로 믿음 부족이나 숨겨진 죄와 연결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는 장애를 단순히 도덕적 원인이나 신앙 수준의 지표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3. 교회는 장애를 가진 성도의 현재 삶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언젠가 나을 수도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자"라는 태도보다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나누어 달라"고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 인도, 중보 기도, 환영 사역, 봉사와 리더십의 자리에서 장애를 가진 성도들이 실제 역할과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4. 교회는 고난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를 세워야 합니다. 탄식과 눈물, 실망과 원망까지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성도와 가족이 교회 안에서 마음을 열어 자신의 고통과 질문을 나눌 수 있을 때, 공동체는 치유의 결과뿐 아니라 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보게 됩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믿음은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확신과, 그분의 때와 방식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 기적적 치유를 경험하고, 어떤 이들은 장애와 어려움을 안고 마지막 날까지 믿음을 지킵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교회가 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고통과 장애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형제자매는 더 이상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약함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증인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길이고, 그 길 위에서 교회는 서로의 짐을 지고 함께 성장합니다. 장애인과 그 가족이 공동체 안에서 예배하고 성장할 수 있는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신뢰하는 지속적인 결단을 통해 교회가 “약한 데서 온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