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이 되면 베들레헴을 떠올리게 됩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구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고 오직 섭리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장소를 우연히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그 탄생의 자리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작은 고을에 태어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을 작은 고을이라고 표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가장 크고 위대하신 분이 작은 고을에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입니다. 예수님은 떡집에 태어나신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님은 친히 생명의 떡이 되셔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의 떡을 먹을 때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몸을 만듭니다. 지성의 양식인 책이 우리의 지성을 만듭니다. 우리가 먹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만듭니다. 우리가 무엇을 읽느냐가 생각의 색깔을 결정합니다. 영생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먹을 때 우리의 영혼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크고 작음은 본질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교회가 되셔서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마구간은 누추한 곳입니다. 깨끗하지도, 잘 정돈된 곳도 아닙니다. 냄새가 나고, 소와 말의 배설물이 있는 곳입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마구간 같습니다.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의 자리들이 제 안에 있습니다. 어두운 마음, 분노하는 마음, 섭섭한 마음, 억울한 마음이 있습니다. 때로는 혼란스럽고 엉클어진 마음, 우울하고 침체된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보여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구간 같은 제 마음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잘 정돈된 집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마음, 지친 영혼, 냄새 나는 제 마음속으로 조용히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부끄러워하며 고백할 때 “괜찮다”고 말씀합니다. “이 모습이 제 모습입니다. 향기를 발하지 못하고 냄새가 납니다.”라고 고백해도 예수님은 여전히 괜찮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꾸미지 않은 마음을 기뻐하시고, 그 마음과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모신 이후로 제 마구간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마구간을 선택하셨습니다. 저는 결혼 후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제 모든 모습을 알고도 이해하고 받아 주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귀히 여겨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우리의 마음도 마구간과 같습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2). 구유는 소와 말이 먹이를 먹는 여물통입니다. 작고, 낮은 곳에 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위대하신 분이 작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구유는 열려 있었습니다.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 빈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낮은 곳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를 높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낮아지심으로 인간을 높이셨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예수님이 작은 곳에 태어나신 것은 작은 것 속에 담긴 엄청난 잠재력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밀알로 오셔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요 12:24).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누구나 가까이 나아 올 수 있는 사랑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목자도, 동방 박사도, 소외된 자들도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모든 사람을 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껴안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들을 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왕궁을 찾지 않으십니다.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구유를 찾으십니다. 낮고, 비어 있으며, 수줍지만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막 10:45). 그 섬김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구유는 십자가의 전주곡이며, 십자가의 예고편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베들레헴은 더 이상 작은 고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태어나신 고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구간은 더 이상 사람들이 머물기 싫어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임하신 순간, 마구간은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구유도 더 이상 초라한 장소가 아닙니다. 빛나는 장소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사모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복된 성탄이 되시길 빕니다.
목양실에서 강 준민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