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돈 로빈슨의 성경적 설교를 위한 제안 (4)
- Dr. Haddon Robinson 등 목회자 및 신학자들의 공저로 제작된 The Art and Craft of Biblical Preaching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약력)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와 달라스신학교(Th.D.) 그리고 일리노이스대학교(Ph.D.)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달라스신학교와 고든콘웰신학교 교수 및 덴버신학교 총장직을 역임했다.

<적용의 이단성>
설교자들은 성경에 신실하기를 원한다. 신학교 다니면서 그들은 주석을 배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 본문에서 현대 세계로 여행하는 방법을 견고히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 우리는 성경 저자가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것은 내가 말했던 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본문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나는 법률적으로 맺어진 관계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어떤 사람이 룻기로부터 설교를 전하는 것을 들었다. 한편으로 보면, 룻기에서 당신이 법으로 맺어진 인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룻기가 법률로 맺어진 관계의 문제를 푸는 방법에 대한 충고를 위해 쓰인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설교는 실제적으로 많은 충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본문의 중심적인 뼈대가 아니고 저자가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실적이고 유용한 자료로 설교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을 설교할 때, 우리는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놓는 어려운 다리
적용에서 우리가 믿는 것은 주어진 특별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또 다른 시간, 장소, 매우 다른 상황에 있는 오늘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을 시도한다. 이것은 보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설교자들은 그 여정을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하나는 성경 본문을 바로 현대적인 상황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잘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청중에게 “여러분들은 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들을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의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말씀을 바로 가져가는 것을 주저한다. 나는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아주 큰 문제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본문들은 바로 오늘의 청중에게 가져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본문과 청중의 상황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지난 세기에 했던 것처럼 “노예 제도는 잘못된 것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나는 ‘노예들은 주인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한 바울에게로 간다. 그러나 내가 그의 세계에 들어갈 때 그는 미국의 19세기에 관한 나의 질문에 필요 적절하게 대답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노예 제도는 우리가 19세기 미국에서 알고 있는 노예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1세기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로 팔렸다. 주인의 보호를 받는 노예로서 그들이 자유로울 때보다 경제적으로 나았다. 대부분의 노예는 30세에 자유롭게 되었다. 그 시대에 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로마의 법은 주인이 그가 원하는 어떤 방법대로 노예를 다루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로마의 거리를 걸어내려 가면, 자유인인 당신은 노예들에게 그들의 피부 색깔이 어떤지 말할 수가 없었다. 바울의 상황과 나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노예에 관한 바울의 충고를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 서신을 처음 읽었던 사람들은 “나는 그가 이 서신으로 무엇을 의미하려는 것일지 궁금하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좀 더 의문들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주제의 의미는 그들에게 분명했다. 나는 그 본문을 고대 세계에서 원리적으로 의미하지 않은 오늘날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이 왜 내가 주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된다. 현대 세계로 건너오기 전에 나는 그 본문에 정직해야만 한다.

추상의 사닥다리
나는 성경의 세계로부터 나와 시간을 가로질러 현대의 정황에 이르는 ‘추상의 사닥다리’(Ladder of Abstraction)를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추사의 사닥다리’를 건너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나는 성경적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이 그들을 연결하려는 부분에서 유비적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나는 그 유비적 연결의 양극단이 아닌 중심을 확신해야 한다. 때로 내가 본문을 연구할 때, 그 본문이 의도하는 바에 이를 때까지 추상의 사닥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레위기는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말씀한다. 첫째로, 당신은 “이것이 모두 무엇에 관한 것인가?”라고 묻는다. 가치의 관점에서 당신은 “만약 내가 어린 염소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오늘 저녁에 어미의 젖으로 요리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두 번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교도들이 우상 신들에게 경배를 할 때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여기서 얻게 되는 의미는 새끼를 어미의 우유로 삶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우상적 요소들이 삶에 개입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지, 그런 관행들을 행하는 자체를 금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이 본문을 곧 바로 가져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신은 그 원리에 이르기까지 추상화의 몇 단계를 올라가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우상 숭배의 예배에 관련시켜선 안 된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우상에게 다가가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듯한 방법들이라고 할지라도 즉 모양이라도 흉내 내선 안 되는 것이다. 본문은 곧바로 적용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추상화시켜라. 추상화 다리를 오를 때 내가 항상 하는 한 가지 일은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추상화시키는 것이다. 모든 본문들은 하나님께 대한 어떤 모습 즉 창조자로서 혹은 격려자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악행의 요소를 발견하라
다음으로 나는 “악행의 요소는 무엇인가? 인간 반역의 어떠한 것이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거스르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런 두 가지 질문들을 적용에서 유용한 단서가 된다. 하나님께서 동일하시고 인간의 악행은 동일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악행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교만, 완고함, 불순종이다. 고린도전서 8장을 생각해 보라. 이 본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주제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모습은 ‘그분께서 우리의 구속자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의 행위가 형제의 양심에 상처를 준다면, 나는 그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 대해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악행의 요소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길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형제를 위해 죽으신 것을 개의치 않는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오늘날 설교자들은 이전 세대들의 적용과 다른 적용을 하려고 한다. 요즘 널리 유행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적용이다. 과거의 적용이 오늘날과 비교해 봤을 때 종종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와 같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설교는 어떻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가, 어떻게 당신의 자녀들을 기르는가, 어떻게 스트레스를 다루는가 등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나는 항상 “그렇게 본문을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20대에 나는 굳게 믿은 것들을 전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나는 “세상에 어떻게 내가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었던 게지?”라며 의아해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남편의 머리됨’의 의미는 남편이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을 기억한다. 더 좋지 않았던 것은 나의 아내는 나의 결혼 주례 설교들 중에 하나에서 그녀의 남편에게 손수 만든 것이 아닌 자판기 커피를 주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했다.

분명히 그런 특별한 적용은 다른 어느 것보다 그때의 정황적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잘 전달되었다. 그때 나는 적용된 것이라고 모리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용했다.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으로부터 의미의 다양한 유형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함축된 의미들은 필요하다. 개연성이 있다. 가능하다, 혹은 불가능하다’ 등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는 간음하지 말라’에 대한 하나의 필요한 함의는 당신의 배우자가 아닌 어떤 사람과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개연성이 있는 함의는 당신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밀착성이 있는 교제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가능한 함의는 당신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정규적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다른 장소로 여행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성 상대와 저녁을 같이 해선 안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적용이다.

원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것인가는 다른 상황에 있는 각 사람들에게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원리는 의논해 협의할 원리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모님을 집에서 계속 모셔야 하는가, 아니면 돌봐 드리는 곳에 가시게 해야 하는가? 당신은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 당신의 집에서 모셔야만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나는 세 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한밤중에 아이들을 깨우고 가족에게 불편함을 주며 집 안을 돌아다니십니다. 이런 것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줍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저런 가능성이 있고 긴장이 있는 원리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적용은 많은 청중을 실망시킬 수 있다. 그들은 할 것을 분명히 듣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화를 이룸으로써 성경에 있는 마찰들과 긴장들을 종종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욥기는 잠언의 신학에 대해 균형을 잡아 준다. 잠언은 인과론을 가르친다. 욥의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잠언적 지혜를 욥에게 다시 말해 준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그들이 모르는 요인이 있었다.

지혜 문헌은 “일반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운행하는 법칙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고 징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가 불순종했음이 틀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순종은 정말 징벌을 가져온다. 그러나 모든 분명한 징벌이 불순종의 결과는 아닌 것이다. 성경은 줄곧 그런 종류의 일들에 관해 말씀한다. 우리는 그것을 ‘조화로운 양편의 균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긴장을 가지고 살아간다. 따라서 본문을 적용할 때,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크리스천답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장르가 적용에 영향을 주는 방법
성경 장르들 또한 적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가장 범위가 넓은 장르는 이야기(narrative)이다. 우리는 성경이 왜 그렇게나 많은 내러티브를 주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이야기들을 가지고 덤불 주변을 치시지 않고 오시는 것인가? 만약 내가 하나님이고 마지막 때까지 지속될 어떤 것을 주게 된다면, 나는 “나의 뜻에 관한 다섯 가지의 원리가 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따라서 내러티브에 들어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배워야 할 세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런 방법은 성경 기록자들이 내러티브를 다루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 아니다. 성경은 영감으로 씌어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세 가지 요점 구조 혹은 다섯 가지 원리들의 구조를 사용하는 해로운 점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자에게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듣는 사람들에게 유용할 수 있다. 그것은 치명적으로 죄를 짓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로부터 설교할 때 내가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긴장들이다. 이 이야기들의 목적의 끝에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사람들이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께 연결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연결되시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셉의 생애에 대한 설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수많은 삶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신실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상급을 받지 못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지경에 있다면,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요셉의 경험이 그들의 경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요셉의 삶에서 있었던 그런 커다란 긴장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긴장이다”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나는 보편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적용하려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하는 큰 원리를 따분하게 추상적으로 다룰 수 있다. 그런 설교는 나에게 지상 8피트 높이에 떠도는 비행 물체가 삶의 현장에 결코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당신은 인간적 요소 없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러티브와 감정적인 상호 작용을 잃게 된다.

성령과 말씀
성령께서 본문을 청중들의 삶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신다. 내가 성경에 충실하다면, 나는 하나님의 영에게 하셔야 할 어떤 것을 드리게 된다. 그러나 내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설교한다면 그분께서 하셔야 할 어떤 것도 갖자 않게 된다. 나는 <고통 + 시간 + 통찰 = 변화>라는 공식을 갖고 있다. 때로 사람들은 고통을 일정 시간 동안 가지고 지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통과 시간에 통찰이 더해지면 변화가 이뤄질 것이다. 이런 지점이 바로 설교자가 있게 되는 곳이다. 이것은 주어진 주일 설교가 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품을 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아무리 위대한 설교자들이라도 모든 설교가 모두를 일깨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 “그 설교가 얼마나 나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는지 상상하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아무 일 없이 오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해온 아픔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설교에서 통찰을 얻었고, 그것이 작동해 그들의 삶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몇 년 전에 나는 하나님께 매우 속이 상해 있었다. 어느 주일에 내가 교회에 갔을 때, 설교자는 특별히 자질이 있지 않았으나 성경 본문을 다루었다. 나는 그 성경 본문을 읽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내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설교자는 그 본문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씀 자체는 예배 후에 오랜 드라이브를 하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나에게 깊숙이 다가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대면해 계셨고 내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진노를 받을 것 같았다”라고 말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 본문과 그 설교자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무리 중에서 집어내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설교는 장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본문과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그분의 집요함은 나의 삶에 그 진리를 다시금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설교의 위대함이다. 설교자가 하난미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일은 항상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