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교회 안에 자주 나타나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시리즈입니다. 매주 한 가지 오해를 살펴보며 성경과 신학과 목회적 관점에서 성찰하여 장애를 가진 성도들이 비장애 성도들과 함께 건강한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지난 글에서는 “장애는 죄에 대한 징벌이다” 와 “장애인은 연민의 대상이지 동역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라는 오해를 다루었습니다.
오해3: 장애인은 일반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
장애를 가진 성도와 함께 신앙생활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은 말을 또렷하게 하지 못하거나 대답이 느리다는 이유로 소통이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발달장애가 있는 성도,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청년, 뇌병변으로 말이 느린 집사, 청각장애로 수어와 입 모양에 의존하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음에도, 그들의 관계 능력은 언어능력에 따라 평가됩니다. 이러한 시선은 한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축소합니다. 이 글에서는 “장애인은 일반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는 오해를 성경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교회가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을 통해 모두를 포용하는 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관계를 맺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능력은 언어 실력이나 지적 수준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안에서 교제하시며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관계적 정체성은 말을 유창하게 하는 능력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보는 문제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지 않을 떼가 많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주저하지만,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시각 장애인]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11-12). 하나님은 모세의 말하기 능력과 상관없이 그를 부르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시각장애인, 지적장애인의 삶 안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통을 인간의 언어 능력만으로 규정하는 관점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다양한 소통 방식이 드러납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듣지 못하고 말이 서툰 사람을 만나셨을 때, 단지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시고 손과 몸짓, 눈길과 탄식을 통해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 7:33-34).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셨는지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로 인해 소통에 어려움을 겪던 이의 처지를 깊이 고려하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직접 다가가셨다는 사실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은 기능 회복만이 아니라 관계와 소통의 회복을 이루십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는 소통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왔습니다. 종교개혁 이전 시대를 돌아보면, 미사와 성경 봉독은 라틴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평신도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교회는 설교를 민중 언어로 전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성화와 스테인드글라스, 벽화와 조각과 같은 시각적 신학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유, 성경 이야기를 그림과 색채로 표현하여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복음의 내용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한 교부는 글이 글자를 아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림은 글을 모르는 이들의 책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언어 능력과 문해력의 차이를 고려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다양한 통로를 고민했다는 증거입니다. 동시에 교회의 이런 시도가 너무 늦게, 또 충분히 넓지 않게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의 소통을 미룰 수 없습니다. 언어와 감각, 인지 방식이 다양한 사람들을 향해 지금 여기에서 복음을 열어야 합니다.
현실에서 장애를 가진 성도는 자주 소통을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예배 중에 발달장애가 있는 성도가 큰 소리로 반응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는 곧바로 별도의 공간으로 안내되고, 함께 예배드리는 경험은 줄어듭니다. 소그룹에서도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 받기 쉽습니다. 청각장애가 있는 성도는 수어 통역이나 자막 없이 진행되는 예배 안에서 부분적인 정보만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장애를 가진 성도는 실제로 말하고 듣고 싶어도 교회가 열어 둔 소통의 문이 매우 좁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비장애인과 소통하는 자신만의 방식과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들에게 소통 능력이 없다는 점이 아니라, 비장애인이 그들의 소통 방식을 배우려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는 미국에 처음 이민 온 1세대 한국인들의 경험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영어와 문화를 잘 알지 못했지만, 서툰 영어와 손짓, 표정을 섞어 감정과 필요를 표현했습니다. 손으로 컵을 잡는 시늉을 하며 물을 요청하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흉내 내면서 배고픔을 표현했습니다.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많은 미국인들은 그 의도를 이해했습니다. 물론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몸짓 언어나 부자연스러운 영어는 미숙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소통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종종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언어와 표현을 배우려 하지 않는 비장애인의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신체장애가 있기 때문에 장애 사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특수사역에 참여했습니다. 그곳에서 다운증후군이 있는 마크라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또렷하게 말하지 못했고, 지적 능력에도 제한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마크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를 내고, 찬양 시간이 되면 음악에 맞추어 갑자기 뛰어오르며 환호했습니다. 저는 왜 그가 그런 소리를 내고 그렇게 뛰고 외치는지 알 수 없어서 당황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곧 마크와의 관계속에서 그에게는 감정과 소망과 필요를 표현하는 고유한 소통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미 그 언어를 알고 있었고, 그와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마크에게는 복잡한 문장을 사용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었지만, 저 또한 그의 언어와 표현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소통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마크만이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언어를 배우려 하지 않은 채, 제 기준으로만 “소통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마크를 완전히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마크가 외치는 소리와 신음 같은 소리, 음악에 맞추어 뛰고 춤추는 몸짓, 갑작스러운 환호와 웃음은 그의 기쁨과 갈망과 사랑을 담아내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표현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들으십니다. 마크가 어머니의 태 안에서 지어질 때부터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방식까지 포함하여 온전히 계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기준으로 그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두고 “말이 서툴고 이해력이 낮으니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고 규정하는 일은, 사실 제가 그의 소통 방식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크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비장애인들 역시 일종의 제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인간 소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소통의 어려움은 장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배우고자 하지 않는 인간의 한계에서도 비롯됩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소통의 정의를 넓히는 일이 필요합니다.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는 모습, 찬양 시간에 눈물을 흘리거나 몸을 살짝 흔드는 모습, 설교 중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함께 눈을 감고 침묵하는 자세도 모두 관계와 신앙의 표현입니다. 말로 길게 설명하는 것만이 교제와 나눔의 전부가 아닙니다. 장애를 가진 성도의 손짓과 표정, 이해할 수 없는 괴성과 움직임, 반복되는 짧은 말과 천천히 나오는 기도도 온전한 소통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표현을 신앙의 언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실천적 차원에서 예배와 교육에서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을 실제로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어 통역과 자막 제공, 그림과 상징을 활용한 설교 설명,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정리한 설교 요약, 반복적인 응답 기도와 몸을 활용한 예배 순서 등은 장애를 가진 성도뿐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 도움이 됩니다. 말과 글 이외의 통로를 열어 두는 일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말씀을 더 넓은 사람들에게 열어 주는 과정입니다. 또한 교회는 장애를 가진 성도에게 실제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보장하고 존중해 줘야 합니다. 소그룹에서 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기도하고 나눌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있도록 시간과 인내를 준비해야 합니다. 말이 느리게 나오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정리해 주기보다, 잠시 침묵을 함께 견디며 그 표현이 완성되도록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결국 “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는 오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관계적 존재로 지으셨다는 창조 신앙과, 복음의 진술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몸과 다양한 언어, 다양한 속도를 가진 사람들을 한 몸 안으로 부르셨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교회가 이 진리를 받아들일 때, 장애를 가진 형제 자매는 더 이상 소통의 바깥에 선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소통이 무엇인지 다시 가르쳐 주는 스승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와 침묵, 말과 몸짓, 눈물과 웃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서로의 다른 소통 방식을 이해함으로 건강한 교회 소통 문화를 발전해 나가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