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 한인타운 크렌셔(Crenshaw)길과 올림픽 대로와 피코 대로 사이, 과거 46개의 방으로 쪼개져 어둡고 밀폐되어 있던 노래방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햇살이 쏟아지는 '빛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림이 걸리고, 음악이 흐르며, 커피 향이 감도는 곳. 유니스 김 관장(LA 미라클 교회 권사)이 이끄는 'EK 갤러리'의 이야기다.
단순한 전시장을 넘어 한인 커뮤니티에 문화 쉼터를 제공하고 싶다는 유니스 김 관장을 만나, 이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은퇴 후 마주한 우연한 소명, “돈보다 나눔이 먼저”

유니스 김 관장은 치열한 패션계에서 수십 년을 보낸 디자이너였다. 1년 뒤의 유행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야 하는 숨 가쁜 삶에 지쳐 은퇴를 결심했을 무렵,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나눔’이었다.
“중앙일보와 함께 노숙자를 돕기 위한 자선 전시를 기획하게 됐어요. 그런데 타운 내에 마땅한 전시장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대관료는 터무니없이 비쌌고요. 비싼 렌트비를 내고 나면 정작 어려운 이웃은 어떻게 돕나 싶었죠.”
그때 지금의 장소를 만났다. 원래는 답답한 칸막이로 가득 찬 유흥업소였지만, 김 관장은 과감하게 모든 벽을 허물었다. 46개의 방을 뜯어내고 벽을 뚫어 창을 내자, 건물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이곳을 돈 없는 작가들도 꿈을 펼치고,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문턱 낮은 갤러리’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무대”
EK 갤러리는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의 엄숙함 대신 열린 커뮤니티를 지향한다. 김 관장은 이곳을 ‘다목적 커뮤니티 타운’이라 정의한다.
높은 천장와 오픈형 구조의 1층 이벤트 홀은 각 행사의 특성에 맞게 변형이 가능하다. 음향과 조명, 벽 한면을 차지한 대형 LED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대형 작품 전시는 물론, 젊은 연극인들의 무대, 패션쇼 런웨이, 결혼식과 파티, 기업 세미나, 지역 사회를 위한 의료 세미나를 위한 장소로 활용된다.
최근에는 악기를 갓 배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단이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연습할 곳 없는 밴드, 무대가 필요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싶었어요. 여유가 있는 분들에겐 대관료를 받지만,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나 단체엔 기꺼이 무료로 내어주기도 합니다.”
◆ 감각적인 ‘Cafe du Gallery’
갤러리를 둘러보다 출출해지면 바로 옆 ‘Cafe du Gallery’로 발길을 돌리면 된다.
메뉴에는 패션 디자이너 시절 유럽 출장을 다니며 맛본 미식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프랑스식 ‘크레페(Crepe)’와 명란을 듬뿍 넣은 ‘명란 파스타’, 그리고 그가 직접 개발한 건강식 ‘레인보우 샌드위치’는 이곳의 시그니처다. 고구마와 아보카도 등 건강한 재료로 채운 샌드위치는 특히 외국인 손님들에게 인기가 높다.
“전시회 왔다가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요. 소풍 온 것처럼 친구들과 맛있는 것 먹으며 수다도 떨고, 그림 이야기도 나누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 “문화를 즐기는 삶, 한인타운의 레벨을 높이다”
김 관장은 15년 경력의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패션 비지니스를 하면서 출장이 잦았던 그는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그곳의 기억을 기록하듯 셧터를 눌렀다. 볕단이 쌓여있는 농촌 풍경부터 요세미티의 빛 내림까지, 풍경을 기록해온 그는 이제 그 시선을 지역 커뮤니티의 성장으로 돌리고 있다.

또, 한인 여성들을 위한 모임을 구상 중이다. 여성들이 집 안에만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와 문화를 즐기고 교류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나누는 꿈꾼다.
그는 한 사람의 삶을 갈무리하는 '장례 문화'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는 EK 갤러리 이벤트홀에서 진행된 타인종 커뮤니티의 행사를 지켜보며 얻은 깨달음이다.
"우리는 장례식이라고 하면 무조건 검은 옷을 입고, 엄숙하고, 슬퍼해야만 효도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곳에서 열리는 미국인이나 타 인종의 장례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고인의 영상을 틀어놓고 생전의 모습을 추억하며, 밴드를 불러 춤을 추고 파티를 엽니다."
처음엔 그도 "장례식장에서 춤을?"이라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남은 유가족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옷 대신 밝은 옷을 입고, 통곡 대신 고인이 좋아했던 음악을 즐기는 모습. 그것이 진정한 '메모리얼(Memorial)'이더군요. 고인의 삶을 기억하고 축복해 주는 '메모리얼 파티'. 우리 한인들도 장례 문화를 전환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서울은 뛰는데 우리는 멈췄다” LA, 문화적 ‘업데이트’ 시급
유니스 김 관장은 한인 커뮤니티의 현실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문화적 충격’을 나눴다.
”예전에는 제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라고 하면 한국에서 다들 특별하게 봤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에 나가면 제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기분입니다. 한국 분들의 문화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거든요. 미술, 발레, 클래식 등 모르는 게 없고, 향유하는 깊이가 다릅니다.”
반면, 김 관장이 바라본 LA 한인 사회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물론 이민 생활이 바쁘고 힘들지만, ‘여유가 없어서 못 한다’는 건 이제 핑계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누가 뭘 샀다고 하면 우르르 따라 사는 경향이 있어요. 나만의 취향이나 안목을 기르기보다 유행을 쫓기 급급하죠. 이건 우리 커뮤니티의 레벨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게 아닙니다. ‘Seeing is Believing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처럼, 와서 좋은 작품을 눈에 담고, 안목을 넓히는 것 자체가 교육이고 발전입니다. 언론과 리더들이 나서서 ‘이제 우리도 문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수준을 높이자’는 캠페인을 벌여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미국 사회의 당당한 주류로 설 수 있습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는 유니스 김 관장. 그는 카페를 오픈하고, 카페 옆에 마련한 아트샵 공간을 교회 모임,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서도 활용하게 되었다며, 성경공부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K. Art Gallery
1125 Crenshaw Blvd. LA, CA 90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