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회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환영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 속에서 장애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관점보다 문화적 관습에 의해 형성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관념들은 언어와 사역 철학과 리더십 기준과 환대 방식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장애를 가진 분들이 공동체에 온전히 속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드러내는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 결과 교회는 의도와 달리 세상의 패턴을 반영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이 시리즈는 교회가 성경적 시각으로 장애를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매주 교회 안에서 자주 발견되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하나씩 살펴봅니다. 이러한 오해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성도의 영적 형성과 신앙 여정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어떤 오해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낳고, 어떤 오해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며, 또 다른 오해는 장애를 가진 성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주제를 성찰할 때 교회는 회개할 부분을 발견하고, 더 큰 긍휼을 배우며,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공동체 비전을 회복하게 됩니다.

성경은 장애를 죄의 벌로 설명하지 않으며, 믿음 부족의 표지로 여기지 않고, 교회 공동체 참여를 가로막는 영적 장벽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며 공동체로 회복시키십니다. 바울은 교회의 지체 중 약하게 보이는 부분이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고통과 탄식을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증언들은 장애가 인간 경험의 자연스러운 다양성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은 모든 연약함 속에서 은혜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단순히 오해를 수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시리즈는 교회가 모든 사람을 환영하며, 모든 은사와 능력과 다름을 존중하고,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로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이 글들이 독자의 신학적 성찰을 돕고 각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진실하게 드러내도록 돕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해 1: 장애는 죄에 대한 징벌이다
교회 안에는 위기 상황에서 드러나는 말과 태도가 있습니다.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성인이 새로운 진단을 받을 때, 공동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려는 마음에 잘못된 신념에 기대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깊은 상처를 남기는 오해는 장애가 숨겨진 죄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징벌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여러 문화와 종교 전통 속에 존재하며 기독교 공동체 일부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이미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게 더 큰 짐을 지우게 됩니다.

한 사례는 이러한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의료적 도움이 많이 필요한 아이를 출산한 한 부부가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따뜻하게 맞아주기보다, 몇몇 사람들은 가정의 영적 문제나 숨겨진 죄, 조상 대대로 이어온 죄의 영향 등을 암시하는 말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동정적인 태도로 기도하면서도 부모에게 미묘한 죄책감을 남깁니다. 부모는 자신들이 의심받고 있다고 느끼며 소그룹을 떠나고 기도와 교제를 줄이게 됩니다. 이 순간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기회를 잃고, 가정에게는 고립과 슬픔과 부끄러움만 남깁니다. 이러한 오해는 한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오해를 직접 다룹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을 보고, 그의 장애 이유를 죄의 문제에서 찾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 혹은 부모가 죄를 지었는지 묻습니다. 당시 유대교와 헬라 로마 문화에서는 장애를 하나님의 저주나 개인의 죄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논리를 분명하게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3).

예수님은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시지만, 장애를 특정 죄의 결과로 연결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장애를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보는 생각을 도전하며, 장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바라보도록 교회를 이끕니다. 성경 전체의 증언도 이 진리를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창세기 1장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체적 능력이나 감각적 기능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욥기는 의로운 사람도 깊은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주며 고난과 죄를 자동으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시편은 사람이 어머니의 태에 잉태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깊이 아시고 계획하셨으며, 태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신비롭고도 놀랍게 빚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시편 139:13–14, 새번역).

사도 바울은 피조 세계 전체가 탄식한다고 설명하며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개인의 잘못으로 좁혀 이해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20-22). 따라서 장애나 고통을 개인적 죄나 대대로 내려오는 특정한 죄의 결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장애는 하나님께서 디자인 하신 인간의 다양성 안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면서, 동시에 타락한 세상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실 가운데 하나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언제나 소외 당하는 이들과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편 147:3, 개역개정).

이 신학적 비전은 오늘날 교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가 장애를 특정한 죄의 대가로 가르치는 순간, 성경을 잘못 해석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들면, 장애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날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더 깊은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게 됩니다. 장애를 가진 이들과 그 가정은 비난이나 억측이 아닌 기도와 지지와 온전한 환대를 필요로 합니다. 목회자와 리더는 장애가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진리를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장애를 가진 이들의 삶은 교회가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기독교적 상상력은 의심에서 연대로, 판단에서 동행으로 나아가도록 교회를 초대합니다. 장애의 존재는 교회를 더 깊은 겸손과 인내, 상호 의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이끕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상한 마음을 가까이하시고 지친 영혼을 붙드시는 분임을 세상에 보여 주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을 사랑의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장애가 어떤 죄 때문에 생겼는가가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어떻게 환대하며 어떻게 함께 걸어갈 것인가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집입니다.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공동체입니다. 장애가 그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해가 만든 장벽이 방해가 됩니다. 교회가 이러한 장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허물어 모두를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