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하다 보니, 성도님들을 책망해야 할 경우가 생깁니다. 주일이면 삶에 지쳐서 위로 받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품을 찾은 여러분들을 보면 도저히 책망이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보게 되면 책망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책망 하는 일이나 책망 받는 일이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지만, 그러나 책망을 통해 고쳐지고 회복될 수 있다면 우리는 책망해야 하고 책망 받아야 합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죽은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살아날 희망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겁니다. 만약 살아날 희망이 없다면 주님은 책망하기 보다는 관심을 끊으시거나 저주를 퍼부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설교자인 저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깨우고 굳건하게 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계 3:2 새번역)

그래서 책망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죽어 버리라’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책망은 결코 우리를 향한 저주나 불평이 아닙니다. 책망에는 우리를 살리고 싶어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책망을 받으면 일단은 불편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통해 책망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반응했습니다(행 2:37).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동일하게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에게 이를 갈고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행 7:54-58). 이 완악한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책망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주님이 오래 참으신다고 하여 멋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벧후 3:9). 귀 있는 사람은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계 3:6). 그 음성을 들어야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영혼이 살아나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