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23일 일본을 방문한다. 이 대통령의 방일은 오는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개최되는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갖는 일정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취임 후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찾는 첫 사례라 더욱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통령실은 이 대통령의 방일이 양국의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한일 간 실질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등 한일 정상 간 유대 및 신뢰 관계를 심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17일 캐나다에서 있었던 G7 회의에서 두 정상 간에 합의한 상호 방문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한·미·일 3각 공조를 더욱 긴밀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진보 정부든 보수 정부든 그 어느 역대 정부도 일본과의 관계만큼은 조심스럽다 못해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그건 일본이 지리적으론 가장 가까우면서도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안긴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뿌리 깊은 반일 감정 탓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이번 방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과거 진보 정권이 수시로 내세운 '반일 프레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진보 진영이 한일간에 첨예한 역사갈등을 반일 선동으로 확산해 정치에 이용해 온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물며 보수 정권에서도 대통령이 취임 2개월여 만에 일본을 방문한 예가 없었는데 이걸 이재명 대통령이 깼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사실 이 대통령도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엔 반일 감정을 자주 드러냈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해법으로 '제3자 변제'를 발표하자 "친일 매국"이라고 맹비난하며 철회를 촉구했다. 한·미·일이 독도 인근 해상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하기로 한 것에 대해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와 욱일기가 다시 한반도에 걸리는 날이 실제로 생길 수 있다"라며 일본 제국주의 시절을 끄집어내 비판했다. 

그랬던 이 대통령의 대일관이 달라진 걸 보여준 게 지난 6월 캐나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때다. 이 대통령은 이시바 총리를 만나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이라는 말로 친근감을 표시했다. 지난 8.15 광복 80주년 경축사에선 일본을 '중요한 동반자'라고 지칭하며 한·일 양국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미래 지향적 협력 의지를 밝혔다. 

이 대통령이 야당 대표 때와 대통령이 된 후 일본을 대하는 인식이 눈에 띄게 달라진 건 관념의 변화라기보다는 방향성의 전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일 관계는 역사 지정학적으로나 안보·외교 측면에서 새롭게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런 과제를 알고도 어느 정부는 반일 감정을 정치에 이용하고, 또 어느 정부는 반일 감정을 의식해 현실을 회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방일이 갖는 의미가 남다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이 대통령과 보조를 맞춰야 할 여당이 여전히 과거의 퇴행적 자세 머물러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점이다. 비근한 예가 지난 광복 80주년 기념사를 문제 삼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친일 매국노"로 매도한 것이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김 관장이 기념사에서 "광복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라고 표현한 걸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친일 매국"이라고 몰아세웠다. "세 치 혀를 놀리는 자에게 단 1원의 세금도 줄 수 없다. 순국선열을 욕보인 자는 이 땅에 살 자격조차 없다"라고 극언을 퍼부으면서 정부에 파면을 요구했다. 민주당은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 대통령이 조국· 윤미향 사면을 비판하는 피켓을 든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을 향해 "친일 독재의 후예"라며 친일 잔재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친 건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렇지만 8.15 해방은 얼밀히 말해 1945년 연합국이 일본에게 군사적 패망을 안긴 결과로 얻어진 결과물이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 쟁취한 승리는 아니다. 김 관장이 3·1운동, 임시정부, 윤봉길 의거 등의 사례들과 함께 연합국의 군사적 승리를 거론한 걸 "친일 매국노"라고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역사 인식의 결여이자 전형적인 '반일 몰이'다. 

민주당의 이런 역사 인식은 문재인 정부 때 반일 선동으로 나라를 분열시킨 퇴행적 습성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해준다. 지난 2019년 7월 일본이 반도체 관련 소재 수출규제 조치를 하자 당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80년대 운동권이 자주 불렀던 '죽창가'로 반일 선동 선봉에 섰다. 이로 인해 국민 사이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 반일 운동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문 정부는 이를 이용해 종북·친중에 더욱 몰입하는 정치적 폐단을 낳았다. 

이 대통령은 지난 8.15 경축사에서 "일본 정부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시바 일본 총리도 "전쟁의 반성과 교훈을 이제 다시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며 일본 총리로는 13년 만에 '반성'을 언급했다. 이는 이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두 나라가 더욱 긴밀한 협력 관계로 나아갈 것을 기대하게 하는 긍정적인 조짐이다. 

한·일 두 나라 사이의 불행은 일본이 과거 우리나라를 강점해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긴 역사의 산물이다. 그런 깊은 상처로 꼬인 매듭을 풀려면 일본의 역사 인식이 달라져야 하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도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역사적 불행으로 빚어진 갈등의 모든 책임을 일본에게 떠넘기고 반일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미래 지향적인 협력 관계는 요원할 뿐이다. 특히 정치권은 21세기에 툭하면 '친일파'니 '매국노'니 하는 과거 퇴행적 '반일 몰이' 습성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