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구유 (이용도 목사)
베들레헴
작고 추한 말구유를
허물치 않으시고
거기 나신 예수님이여!
나의 작고 추한
마음 구유에
탄생하시고
좌정하시옵소서
이시는 한국 초기 기독교 신앙 지도자 이용도 목사의 시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자신이 시인인줄도 모르고 많은 시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설교와 일기에 등장하는 시들을 후대 사람들이 정리하여 시집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시는 뜨거운 신앙고백이 담긴 명시들이 많습니다.
많은 성탄절 시들을 읽었지만, 이용도 목사님의 <마음 구유>만큼 명쾌하게 성탄절의 기쁨과 소원을 표현한 시가 없습니다. 저는 이 <마음 구유>를 성탄절의 시 중에 가장 사랑합니다. 이시는 1927년 12월 24일(토) 이용도 목사님이 쓰신 그의 일기에서 발견한 시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심령에 임하신다는 것을 기뻐하며 기록한 일기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용도 목사는 예수님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왜곡되는 세태를 간파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탄생 역사를 정리하며 “작고 추한 말구유”를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작고 추한 말구유를/ 허물치 않으시고/ 거기 나신 예수님이여!”라고 노래합니다. 1연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는 “허물치 않으시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의 누추함과 옹색함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표현하는 시어가 “허물치 않으시고”입니다. 시인은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허물치 않으시고”에 담았습니다.
2연에서 시인 이용도 목사님은 “나의 작고 추한/ 마음 구유에/ 탄생/ 좌정하시옵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말구유를 탓하지 않으신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작고 추한 자신의 마음 구유에서 주님께서 탄생하시고 좌정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성탄절의 참 의미는 예수님을 마음의 구유에 모시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의미가 점점 퇴색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의미를 모르는 문화가 팽배합니다.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마음 구유에 모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현대 사회 일각에서는 성탄절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을 막는 세력도 있습니다. 성탄절 자체를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탄절, 예수님, 그리고 구원 이런 단어와 개념을 없애려는 무서운 문화가 시대를 지배합니다.
나아가 성탄절을 이용해 욕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의 구유에는 예수님을 모시지 않으면서 2000년전에 베들레헴에 예수님의 오심을 이용하는 상업적 성탄절이 난무합니다. 성탄절의 참 의미는 접어 두고 쾌락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탄절의 들뜬 분위기를 타락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우리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용도 목사의 시 <마음 구유>는 더욱 큰 울림이 있습니다. 오래전 베들레헴 말 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의 구유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시를 읽은 모든 독자의 마음 구유에 예수님께서 좌정하시길 기도합니다!
이용도 목사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 178번지에서 이덕흥씨과 양마리아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기도를 많이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으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핍박했다고 합니다. 이용도는 어머님을 따라 신앙생활을 했고 13세부터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용도는 시변리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5년 경기도 개성의 한영서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남감리회의 미션스쿨이요 개천절을 개교기념일로 하는 민족학교였습니다. 이용도는 비상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며 신앙과 민족정신을 다듬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용도 목사는 신앙의 지도자로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용도는 청년 시절 1919년부터는 독립운동으로 4차례 체포되고 갇혔습니다. 이용도 목사는 1924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928년 1월 졸업한 뒤 강원도 통천으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1928년 11월부터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사역으로 그의 이름은 경기도로, 황해도로, 평안도로, 심지어 북간도와 경상남도로까지 퍼져나가 전국적으로 회개와 중생을 외치며 선풍적인 기도운동과 부흥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31년 6월에는 감리교의 경성지방 순회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뜨거운 인기와 급진적인 신비주의적 성향 때문에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용도가 주도한 기도운동과 성령 운동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 신비주의자로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그의 사상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신학과 신앙이었습니다. 특히 장로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1932년 10월에 장로교 황해노회가 그에게 금족령을 내렸고, 1932년 평양노회가 금족령을 내렸습니다. 그의 소속 교단인 감리교회 중부연회도 1932년 11월에 휴직 처분을 내렸습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던 그는 1933년 10월 2일 33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용도 목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습니다. 1997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이용도 목사를 복권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도 2015년 내부적으로 이 목사의 사면을 검토했습니다. 최근 이용도 목사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를 묶은 ‘이용도 목사 전집 1, 2권’(주의것)이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