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저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1896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어 전주와 군산 그리고 목포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평생을 보내며 이 지역의 유무형의 선교 인프라를 깔아 호남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수회에 나누어 본지에 싣기로 한다.

영명학교 사역

전킨 선교사가 1902년 영명학교를 세울 당시만 해도 소학교 과정이 고작이었으나 1904년 하위렴이 부임하면서 중학교 과정도 설치했다. 그 당시 소학교 과정에 14명, 중학교 과정에 12명으로 전부 합해도 고작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위렴은 1904년 가을부터 1906년 2월까지 매일 2시간 30분씩 성경과 산수, 지리를 가르쳤다. 1907년이 되면서 학생이 늘어 46명이 되자 다시 어아력A. M. Earle 선교사와 함께 수업을 나누어 맡기도 했으나, 그해 홍역이 창궐하는 바람에 다시 출석 인원이 30여 명 정도로 줄고 말았다.(각주 1) 2학기에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교사를 채용해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도 했다.(각주 2)

한편 주간에 공부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야학을 열기도 했는데 고맙게도 교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들은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수업을 맡아 주었다. 야학에 등록한 학생들이 14명 정도 되었는데 주로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정은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여서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에도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주 야간 모두 합해서 남녀 학생들은 평균 30여 명 정도 되었다. 어떤 여학생들은 야학에 나오고자 했으나 딸이 집 밖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부모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각주 3)

무엇보다도 학비를 낼 수가 없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들이 증가하자, 하위렴은 궁리 끝에 실과를 신설하고 설비를 들여다 방과 후 학생들에게 가마니를 짜도록 했다. 세 사람이 반나절이면 한 장을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마니 판매 수익금이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군산은 호남평야 각지에서 실어 온 쌀을 일본으로 실어 가기 위해 가마니의 수요가 엄청났다는 점에 착안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안타깝게도 학생들이 만든 가마니는 일본에서 들여오는 수입 가마니와 가격경쟁에서 비교가 되지 않아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포기해야만 했다.(각주 4)

하위렴은 그해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영명학교의 실과 운용 사례를 발표하면서 현실적으로 학생들의 학업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노동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보다 적극적으로 실업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후로 그가 목포 지부에 옮겨 갔을 때도 영명학교의 사례를 적용해 실과를 운용했으며, 남학생들에게는 목공과 도배공사, 우물 파기, 길과 다리 보수공사, 철망 두르기 등을 가르치고, 여학생들에게는 양재, 바느질, 뜨개질, 자수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제 6 장 내한 선교사 에드먼즈와의 재혼(1908)

북감리교 내한선교사, 에드먼즈(Margarret J. Edmunds)

북감리교 내한선교사로 내한했던 에드먼즈는 1871년 캐나다의 온타리오주의 작은 시골 마을 페트로리아Petrolia, ON에서 태어났다. 페트로리아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유전지대였다. 북미에서 석유가 최초로 발견된 지역으로 개발의 바람이 한창 불던 1860년대, 에드먼즈의 아버지 노아Noah Edmunds는 페트로리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의 고향 스미스 폴스Smith Falls, ON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캐나다라고 하지만 페트로리아에서 미시간주 접경까지 15마일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도시로 나가려면 오히려 미국 쪽이 더 가까웠다.

그의 아버지 노아는 고향에서 제법 이름난 대장장이로, 아내 파멜리아Permelia Rose와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 에즈먼즈는 그중 여덟 번째였다. 위로 언니가 셋, 오빠가 넷이 있었고, 남동생 하나와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석유개발의 붐을 타고 페트로리아에 몰려든 주민들 대다수가 그랬던 것처럼 보잘것없는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에즈먼즈는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2남매가 함께 사는 낡고 비좁은 통나무집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며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에드먼즈는 늘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어려서부터 나이팅게일을 동경했던 그녀는 자신도 언젠가는 간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늘 머릿속을 채우곤 했는데 어쩌면 이때부터 넓은 세상을 그리며 호젓한 가출(?)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국경 건너 미국의 미시간대학에 간호학교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드먼즈는 마치 이 학교야말로 자신을 위해 예정된 운명의 통로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간호학교를 지원한 그녀는 4년의 과정을 마치고 간호사가 되자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1894년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 OH시의 외곽 빈민 지역에서 가난한 산모와 어린아이를 돌보는 방문 간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1900년에 접어든 어느 날 그녀가 출석하던 톨레도 웹워드 연합감리교회Epworth United Methodist Church에서 선교 집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 강사로 나온 커틀러Mary M. Cutler(각주 5) 양은 조선에 파송된 북감리교 여의사라고 자신을 간단히 소개한 뒤, 곧바로 조선에서의 의료선교 상황을 설명하고 간호사가 전무한 조선에서 간호사 양성의 시급함을 역설했다.

우연한 기회에 집회에 참석했다가 커틀러 선교사의 간절한 호소에 크게 감명을 받은 에드먼즈는 곧바로 '북감리회 해외 여자선교회'에 조선 선교사를 지원했다. 그녀가 선교사에 지원하자 교단에서도 그녀를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웹워드 연합감리교회에서도 적극적인 후원을 약속하고 나섰다.

마거릿 에드먼즈(1903)
(Photo : ) 마거릿 에드먼즈(1903)

그녀가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소식이 캐나다의 가족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딸이 고향을 떠나 미국에 홀로 가 있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선교사 지원 소식에 놀라며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조선에 어린 딸을 결코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몇 개월 동안 거의 싸우다시피 부모님을 설득해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낸 에드먼즈가 커틀러Mary M. Cutler와 홀Rosetta S. Hall(각주 6) 두 선교사와 함께 뉴욕에서 런던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은 1902년 캐나다의 짧은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문턱에 접어들던 무렵이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하는 태평양노선 대신 대서양을 건너 런던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보다 긴 여정을 택했다.

6개월의 기나긴 항해를 하는 동안 에드먼즈는 심한 멀미에 시달려 피곤하기는 했으나 다행히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커틀러와 홀 두 선교사로부터 조선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사역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배우는 유익한 여정이었다. 일행이 고베와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3년 3월 18일이었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서양 의료 시설이 제대로 소개조차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조선의 의료체계는 말 그대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제중원(각주 7)이라는 병원이 개설되어 있다고는 해도 양반 상류층을 위한 진료소로만 여겨져 일반 백성의 출입은 아예 허용조차 되지 않았다. 보구여관普救女館(각주 8)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의 진료를 위해 정동에 문은 열었어도, 신분이 낮은 일반 부녀자들이 진료받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에드먼즈는 조선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그해 겨울 서둘러 보구여관에 간호원 양성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모집하면 금방 모여들 줄 알았던 것부터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그 당시만 해도 여성의 사회활동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간호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혀 없던 때라 여자가 외간 남성을 시중들고 간호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 통념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동에 소재했던 보구여관(普救女館)
(Photo : ) 정동에 소재했던 보구여관(普救女館)

그 이듬해인 1904년 겨우 5명의 학생을 모집해 간호학교의 문을 열었다. 조선 최초의 간호원 양성학교였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20년, 심지어 중국과 비교해도 10년 정도 뒤늦게 출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간호원 수칙과 임무를 제정하고, 조선 여성에게 걸맞은 간호원 복장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1908년에는 한글로 된 간호 교과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보다 먼저, 개교 이듬해인 1905년에는 일본 적십자사와 협력사업으로 러일전쟁 기간 발생한 부상병을 치료하는 간호 현장에 2명의 조선 학생을 선발해 견학시키기도 했다.

에드먼즈는 1908년 하위렴 선교사와 결혼하면서 보구여관을 떠났지만, 두 해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한국 최초로 간호원를 양성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 후 그녀는 하위렴의 사역지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간호원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보구여관 간호원 양성학교를 마친 최초의 간호원 (그레이스 리, 마르다 김, 엘렌 김, 매티 정, 가운데가 마거릿 에드먼즈)
(Photo : ) 보구여관 간호원 양성학교를 마친 최초의 간호원 (그레이스 리, 마르다 김, 엘렌 김, 매티 정, 가운데가 마거릿 에드먼즈)

각주
1. William B. Harrison, "Evangelistic Work in Chulla Circui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8. Aug. 1907, pp. 127
2. William B. Harrison, "Notes from Kunsan",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9, Sep. 1907, pp. 132 (그해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군산에 내려온 김창국으로 추정됨.)
3. 위의 책, pp. 132
4. William B. Harrison, "Evangelistic Work in Chulla Circui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8. Aug. 1907, pp. 127
5. Mary M. Cutler(1865-1948) 미시간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로 내한해서 1893년 보구여관에 부임해 1912년 평양으로 이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보구여관에 소속되어 사역했다.
6. 1890년 미 북감리회 여성 해외선교회 선교사이자 의사로 내한해 그녀는 보구여관에서 사역하면서 남성 중심의 병원에 여성의 진료가 어려운 시절 여성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했다. 여자 의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7. 고종의 명에 의해 1885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8. 보구여관(普救女館)은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Wome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후원으로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1832~1909) 여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이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