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가슴 아픈 삶>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책 전체의 주인공 영혜의 이 질문은 스스로 죽고자 하는 이들이 자기 죽음의 정당성에 세례를 베풀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자기 목숨이 자기 것이라,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없기에,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의 키워드 중 하나는 가슴인 것 같다. 영혜가 거의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가슴이 답답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해를 하고 난 뒤 꿈 속 독백이 가장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아픈 건 가슴인데 이유는 그 가슴에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에도 죽음과 가슴은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그런데 영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영혜의 이 말은 칸트의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세 질문을 연상시킨다. 영혜식으로 답하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다. 철저한 허무주의적 불가지론의 모습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픈 가슴으로 살아가는 이가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혼자만 아프다, 생각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아픔이 가장 크다, 생각지 말아야 한다. 영혜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서도 비슷한 표현에 집착한다. “아무도 날 이해 못해……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자신을 살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자신의 숨을 쉬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 잘난 고상함이 타자의 도움을 거부하며, 자신의 아집이 자신을 살리지 않으며, 자기중심성이 자신을 숨 쉬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죽이는 거다. 엄연한 ‘자기중심적 자기살인’이라 할 수 있다.

<살아본 적 없는 삶>
이런 생각을 가지고 언니 인혜가 왕십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철길 사이에 피어난 풀들을 바라볼 때 했던 생각을 들여다보자. 그녀는 ‘이 세상을 살아본 적 없이 다만 견뎌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살아본 적 없이도 살 수가 있구나. 생을 살지 않고 견뎠다는 건 슬픈 현실이자 가슴 아린 자기 독백이다. 때로는 견디는 것도 인생이지만 인생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사는 것과 견디는 것의 차이는 커도 너무 크다. 생이 아무리 어려워도 견디기보다는 살아야 한다. 생은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인혜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동생 영혜의 모습을 보면서 바꾼다. 삶을 살지 못하고 견뎌온 자가 생의 줄을 놓으려는 자에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책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건 말이야……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그녀는 고개를 든다.”

동생을 살려 보려고 고개 숙여 ‘지금의 모습은 꿈이야. 꿈이 전부는 아니야.’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말이 끊어진다. 그리고 고개를 든다. 갑자가 말이 끊어지는 걸로 봐서 영혜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인혜는 그것을 죽음과 삶의 대구로 묘사한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 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먹구름장과 햇살의 대구다. 죽음과 삶의 대구다. 먹구름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눈부신 햇살이듯이, 죽음을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게 만드는 영역은 어쩌면 생의 눈을 찌르는 눈부신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눈이 부신다는 것, 그것은 살아야 할 이유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삶>
이러한 삶과 죽음의 대립 앞에 인혜의 마음과 눈은 복잡하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신학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인혜의 눈은 신정론적 물음을 제기하는 눈이다. “왜, 왜, 왜 내 동생이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저항이다. 답을 얻지 못한 ‘눈은 어둡다. 하지만 그 답을 얻기 위해 그녀의 눈은 끈질기다.’ 여름 햇살에 그토록 눈부셨던 눈인데도 말이다.

영혜가 던진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라는 질문에 ‘왜, 죽어도 되는 거야?’라고 되묻고 싶다. 죽어도 되는 건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도 되는 건가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영혜를 살릴 수 없을까. 우리 모두의 과제이지 싶다. 비존재자의 입장에서 존재자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신비의 대상이다. 그러기에 가슴 아파도, 살아본 적 없는 삶이어도, 우리 인생은 살아가야 할 존재론적 이유가 있는 삶이지 않은가? 죽어도 되는 건가? 목숨, 그렇게 가벼운 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삶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