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함께 ‘산책’을 다니시곤 했다. 저녁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아파트 단지를 한바퀴 둘러보시곤 하셨는데, 산책하시는 모습을 보면 두 분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셔서 옆이나 뒤도 안 돌아보고 혼자 앞으로 후다닥 직진하셨던 반면, 어머니는 한참 뒤에서 이곳저곳 쇼윈도, 간판 다 구경하시며 천천히 따라가셨다. 그 모습이 정말 재밌었다. 내 기억엔 두 분이 함께 보조를 맞추며 다정하게 걸으신 적이 한 번도 없던 것 같다.
또 항상 바쁘신 아버지가 모처럼 쉬는 휴일에 가족끼리 어디 놀러갈 때도 아버지는 벌써 준비를 다 마치시고 문 밖에 나가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누른 채 우리에게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시는데,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일일이 챙기시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 결국 두 분 사이에 큰소리가 나고 다툼이 일어나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가 썰렁해질 때가 많았다.
최근 아버지와 어머니가 4개월 간격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는데, 두 분이 천국으로 떠나가신 여정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여름 아버지는 급성폐렴으로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신지 단 사흘만에 가족과 마지막 작별인사도 못하신 채 급하게 떠나셨지만, 어머니는 파킨슨병과 신장암으로 병세가 너무나 위중한데도 남은 식구들이 염려되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주기 위해 쉽게 떠나시지 못하고 한참을 버티시다가 지난 12월 말 천국으로 가셨다.
장애자녀를 둔 엄마의 간절한 소원이 자녀보다 하루 늦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는데, 우리 어머니라고 왜 그렇지 않으셨겠는가? 내가 아무리 장성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목사가 되었다 한들 우리 어머니 눈에는 한낱 연약한 자식일 뿐이고 사람 같지도 않던 아들을 조금이라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당신의 모든 열정과 젊음을 바쳐오셨던 만큼, 이제 이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눈을 감으시는 게 말할 수 없이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홀로 살고 있는 둘째 아들 성욱이에 대해서도 걱정과 근심이 엄청 크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나로서도 내가 지금껏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게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던 아버지, 어머니를 연이어 떠나 보내드리니 슬픔의 차원을 넘어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상실감과 함께 내 존재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내가 과연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자꾸 되묻게 된다. 솔직히 몹시 두렵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나를 그토록 열심히 최선을 다해 키우신 이유와 목적이 바로 당신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내가 결코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데에 있는 만큼, 두려움과 염려보다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신념을 지닌 채 나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계속 성실히 이루어가리라 다짐해 본다. 부모님과의 이별이 내 인생에 있어 새로운 출발이요, 장애인으로 진정 자주적아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지난 UCLA에서 홀로 유학하던 시절, 어머니가 나를 보러 미국에 오셨다가 돌아가실 때면 꼭 이런 쪽지를 남기시곤 했다.
“사랑하는 아들 준수야, 엄마는 이제 떠난다. 감기 걸리지 않게 밤에 꼭 창문 닫고 자고, 휠체어도 조심조심 타고 다녀라. 또 어려운 일 있으면 혼자 하려 애쓰지 말고 주위 분들에게 부탁하고… 엄마는 항상 걱정 걱정… 이제 엄마 잔소리 안 듣게 되어 좋지? 요놈아~~”
수업에서 돌아와 더 이상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빈 방에서 이 쪽지를 읽으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곧 “엄마, 염려 마세요. 내가 잘 할게요!”라고 외치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얼마 전 우리 어머니가 천국을 향해 마지막 여정을 떠나실 때도 나에게 또 이런 메시지를 남기셨을 것이며, 나는 무너져 내리는 가슴으로 그 메시지를 읽으며 천국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 또 이렇게 조용히 말씀드렸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온 정성을 다해 키운 아들 준수는 결코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베풀어주신 엄청난 ‘사랑의 힘’으로 인생 끝날까지 견디고 버티며, 그 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하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천국에서 항상 지켜봐 주십시오!”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다시 기쁘고 반갑게 만날 날을 간절히 기대해본다.
글 | 이준수 목사 (남가주밀알선교단 영성문화사역팀장)